이명박 정부의 임기가 한 달 정도 남은 시점에서, 청와대는 현 정부의 분야별 국정 성과를 인터넷 홈페이지에 소개해놓았다. 이명박 정부가 핵심 국정사업으로 추진한 4대강 사업에 대해서도 “물환경, 수자원, 친수개발의 종합해법”이라고 자평하고, OECD·UNEP와 같은 국제기구에서 녹색사업의 모범사례로 높이 평가했다고 자랑했다.
며칠 전 감사원이 발표한 4대강 사업에 대한 종합평가는 이와 같은 청와대의 자화자찬이 사실과 얼마나 다른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감사원은 22조 원이라는 천문학적 예산을 들인 4대강 사업에 대해 설계부터 시공, 관리, 유지·보수에 이르기까지 총체적 부실이라고 종합평가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청와대가 자화자찬한 국정 성과를 과연 믿을 수 있는지 점검해보지 않을 수 없다.
임기가 한 달 남은 이명박 대통령 (서울=연합뉴스)
'원칙'을 지킨 것이 대북정책의 성과?
청와대가 내놓은 국정 성과 가운데, 4대강 사업에 대한 평가 못지않게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평가가 있으니, 바로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이다. 이명박 정부는 외교안보 분야의 첫 번째 성과로 “원칙에 입각한 대북정책”을 꼽고, 구체적으로 네 가지 항목을 열거하고 있다.
첫째, 북한 내부에 긍정적 변화의 동력 조성이다. 변화의 동력이란 대규모 식량중단에 따른 배급체제 유명무실화, ‘5·24조치’ 및 국제제재에 따른 물가폭등과 양극화 심화를 초래하여 북한주민의 의식 변화를 통해 아래로부터의 변혁을 유도했다는 것이다. 결국 북한주민의 고통을 심화시켜 북한체제의 변화를 꾀하려 했다는 말이다.
둘째, 남북관계 패러다임 전환과 지속가능한 평화기반 강화이다. 무조건적 포용 대신, 상호주의에 기초한 남북관계로 전환시키고, 미사일 사거리 연장을 통해 평화를 강제할 군사적 수단을 확보했다는 것이다. 남북관계를 갑을관계로 재편하려다가 상호주의는커녕 상호주의를 논할 대화 한 번 제대로 못한 것을 과연 남북관계의 패러다임 전환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북한의 도발에 우왕좌왕 안보 무능을 보이다가 중국의 군사력 억제 차원에서 미국이 미사일 사거리의 연장과 무인항공기(UAV) 판매를 허용한 것을 두고 평화기반 강화라고 평가하는 것은 앞뒤가 뒤바뀐 논리이다.
셋째, 북한 인권문제를 국제적 의제로 부각시켰다는 점이다. 하지만 북한 인권문제를 국제적 의제로 제기한 것은 유감스럽게도 한국정부가 아니라 유럽연합이다. 유럽연합은 북한과의 수교 조건으로 인권개선을 내걸었고, 2005년부터 유엔총회를 통해 북한인권결의안을 채택하여 북한 당국에게 인권개선을 촉구해왔다. 이명박 정부는 북한인권을 말하면서도 정작 대북 인도적 지원을 제한해 북한주민의 생존권적 인권을 악화시켰다.
넷째, 북한 내 위기상황 발생에 대비하고 통일문제를 공론화함으로써 한반도의 새로운 미래를 열기 위한 국내외적 여건 조성에 착수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현실은 근거 없는 북한붕괴론을 유포시키는가 하면, 입으로는 통일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남북한 주민들의 상호적대감만 고취시키고 북한의 중국 의존도만 심화시켜 남북분단을 더욱 고착시켰을 뿐이다.
북한의 '중국 의존도'만 심화시켜 남북분단을 더욱 고착시켰을 뿐
이처럼 이명박 정부가 자화자찬한 대북정책의 성과라는 것을 따져보면, 남북화해, 한반도 평화, 통일을 앞당기는 이정표 등 ‘원칙’을 지켜가며 대북정책을 폈다는 추상적인 말뿐이다. 그렇다면 이명박 정부가 견지해왔다는 대북정책의 ‘원칙’이란 무엇이고, 그 정책 내용은 어떤 것인가?
‘원칙’이란 어떠한 상황 변화에도 바뀌지 않고 관철시켜야 할 정책 또는 협상의 기본원리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급변하는 것이 남북관계인데 상황 변화에는 무관하게 변하지 않는 기본원리를 추구하다보니, 이명박 정부가 초기에 내걸었던 ‘실용주의’는 온데간데없어지고 이데올로기만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원칙'의 이데올로기화는 남북관계의 장애물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처음에 내건 대북정책 원칙은 남측을 시혜자로, 북측을 수혜자로 보는 ‘갑을관계론’이었다. 이러한 원칙에 입각해, 북한이 먼저 손을 내밀어야 인도적 지원도 할 수 있고 핵문제에서도 북측의 양보가 있어야 남북경협도 확대할 수 있다는 정책을 추진했다.
하지만 체제경쟁자인 북한이 굴욕을 강요하는 갑을관계를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북한은 남측의 자세에 반발해 우리 측의 인도적 지원을 거부했고,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망사건 이후에는 판문점의 통행제한을 담은 ‘12·1조치’를 선제적으로 취했다. 그 뒤 북한은 오바마 미 정부의 출범에 맞춰 장거리 로켓발사와 2차 핵실험 등 한반도에 군사적 긴장을 높이는 조치를 취했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 ‘원칙’은 점차 ‘갑을관계론’에서 엄격한 상호주의로 바뀌고, 대북정책은 김정일 위원장의 와병과 천안함·연평도 사태 이후 공공연하게 대북압박을 통한 ‘조기붕괴 촉진’으로 바뀌어갔다. 하지만 결과를 놓고 볼 때, 우리의 대북정책은 북한의 조기붕괴를 촉진시키지 못했으며 단지 북한 내부의 결속력만 강화시켰을 뿐이다.
대북 압박을 통한 조기붕괴 촉진? 북한 내부의 결속력만 강화시켰을 뿐
이렇게 이명박 정부가 ‘원칙에 입각한 대북정책’을 내걸고 스스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자평하고 있지만, 현실은 남북 간에 불신만 커지고 군사적 긴장만 고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원칙’은 계륵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우리는 6자회담도 제대로 열지 못한 채 북한의 두 번째 핵실험과 인공위성 발사 성공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
▲ 이 대통령과 박 당선인이 청와대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처럼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 성과는 참담하다. 그렇기 때문에 새 정부의 대북정책에 거는 기대는 어느 때보다 크다. 특히 박근혜 당선인은 어느 정치인보다 ‘신뢰’를 강조하고 있고, 또한 실천해왔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남북관계에서도 ‘신뢰’를 중시하여, 대선공약으로 내건 대북정책의 이름도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이다.
박 당선인의 입장을 엿볼 수 있는 가장 최근의 발언은 커트 캠벨 미 국무부 동아태차관 등 미국 방문단을 접견한 자리에서 나왔다. 그는 “북한의 핵개발은 용납할 수 없고 단호히 대응하겠지만, 대북 인도적 지원을 포함한 대화의 창은 열어둘 것”이라고 밝혔다. 이것은 ‘신뢰’를 강조하면서 북핵 불용과 대화를 병행한다는 박 당선인의 생각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박근혜 정부, 이번엔 '신뢰'가 이데올리기화 되지 않을까 염려
여기서 우려되는 것은 박근혜 당선인의 대북정책이 지나치게 ‘신뢰’를 강조할 경우, 자칫 이명박 정부의 발목을 잡은 ‘원칙’과 마찬가지로 이데올로기화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우리 측의 선의에 대해 북측이 선의로 대응해 오고 남북 간의 약속을 잘 지켜준다면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가 원활히 작동되어 남북한의 평화공존도 이루어지고 북핵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측의 선의와 남북 간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만약 북측이 이에 악의적으로 대응하거나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할 경우, 과연 박근혜 새 정부가 어떤 대북 자세를 취할 것인가 하는 점이 관건이다. 신뢰는 중요하지만, 어느 일방에서 요구한다고 구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박근혜 새 정부의 대북정책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때가 곧 올 것 같다. 그저께(24일) 유엔안보리는 북한의 우주로켓 발사에 대해 '대북제재'를 결의하였다. 만약 북한이 이에 반발해 3차 핵실험이라도 하거나, 아니면 그들의 공언대로 우주로켓을 추가로 발사할 때, 과연 새 정부가 어떻게 나올 것인가.
신뢰 구축을 위해선 '원칙'보다 '좌표' 설정이 무엇보다 중요
먼저 남북 간의 신뢰가 쌓여야만 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필요한 경우에는 우리가 먼저 움직여서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계기를 만드는 노력이 중요하다. 신뢰는 남북대화의 전제가 아니라, 대화를 통해 구축되는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임기 5년 동안 어떤 수순과 수단으로 세워놓은 국정목표를 달성할 것인지 대북정책의 ‘좌표’를 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궁극적으로 좌표에 접근하는 여러 갈래의 길이 있음에도 어떤 길이 아니면 안 된다고 발걸음도 떼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런 점에서 박근혜 정부의 인수위원회는 대북정책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원칙’보다 ‘좌표’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 이 글은 평화재단 제66호 현안진단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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