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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평화

한일 갈등의 배경, 지지율 낮은 한일 두 정상

서세동점의 시기에 동아시아에서는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민족주의가 기세를 올렸었다. 일본제국주의의 패배 이후 한동안 민족주의는 동서 양진영 간의 이데올로기 대립에 덮여 판도라의 상자 안에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냉전의 종식과 함께 사회주의가 몰락하면서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막을 내리자, 나라들의 사정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민족주의의 기운이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누가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나

 

중국의 국가지도자들은 양극화에 따른 불만과 다민족사회의 구심력 확보를 위해 민족주의를 활용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실제로 중국은 ‘중화민족대가정’, ‘중화민족주의’를 내세우며 역사를 자의로 재해석하면서 사회불만을 외부로 돌리고자 하였다. 일본도 중국에게 세계경제 2위의 자리를 내준 좌절감,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 등으로 침체된 사회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한 돌파구를 민족주의에서 찾고자 했다.

 

이러한 분위기가 반영된 탓인지 최근 들어 해상영토분쟁이 잇따르고 있다. 재작년 9월 조어도(釣魚島․尖閣列島) 주변해역에서 중국선박의 나포를 둘러싼 중·일 간의 갈등을 비롯하여 남중국해의 섬들을 둘러싼 중국과 동남아국가들 간의 해상영토분쟁이 있었다. 금년 7월 초 메드베데프 러시아 총리는 2010년 11월에 이어 두 번째로 남쿠릴열도를 방문했으며, 범중화권 활동가들도 조어도 상륙을 예고했었다. 그런 와중에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전격 방문하고, “일왕이 한국에 오려면 독립운동 희생자들에게 먼저 사과해야 한다.”라고 요구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 전개는 결국 일본민족주의마저 판도라의 상자에서 불러냈다. 이번에 일본정부가 한국에게 보인 반응은 그동안 일본이 취했던 태도와 사뭇 다른 매우 강경하고도 도를 넘는 것이었다. 일본정부는 즉각적으로 “예의를 잃었다”고 반발했으며, 겐바 외상은 “한국이 (독도를) 불법점거하고 있으며 이 대통령의 방문은 불법상륙”이라고 말했다. 노다 총리도 이명박 대통령에게 일왕 발언에 대해 사죄와 발언취소를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항의서한을 보내면서 일방적으로 공개하는 외교적 무례까지 저질렀다.

 

 

 

20%대 지지율의 임기 말 한국대통령 vs 총선을 앞두고 있는 10%대 지지율의 일본총리

 

이와 같이 한·일 양 정부가 한 치의 타협도 없이 상대방을 자극하는 말과 조치들을 내놓고 있는 배경에는 20%대 지지율을 보이고 있는 임기 말 한국대통령과 조만간 의회 해산과 총선을 앞두고 있는 10%대 지지율의 일본총리가 있다. 그 발단의 원인이야 어떻든 간에 이제 독도 문제를 둘러싼 한·일 간의 갈등은 양국 국민들의 민족주의 감정에 불을 질러놓음으로써 마주보고 달리는 기차와 같이 어느 쪽도 먼저 멈출 수 없는 형국이 되었다.

 

이번 사태로 한·일군사협정은 완전히 물 건너가

 

이번 한·일 간의 감정적 발언과 조치들은 양국관계의 차원을 넘어 동북아 국제질서의 재편방향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명박 정부에 들어와 해방 이후 최초로 일본군함이 한국 영해에 들어와 연합해상훈련을 실시하였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일 두 나라는 군사협정을 체결하여 ‘준군사동맹’으로 양국관계를 격상시키려고까지 했다. 특히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은 서명 한 시간 전에야 무산될 정도로 코앞까지 갔었다. 하지만 이번 사태로 상당 기간 한·일 양국이 군사협력을 확대·강화할 동력을 상실했다.

 

지난 8월 24일 노다 총리는 현직 총리로서는 31년 만에 “독도를 한국이 불법 점거하고 있다.”고 발언했으며, 같은 날 일본 중의원도 ‘(한국의) 불법점거’를 규탄하는 독도결의안을 59년 만에 채택하였다. 이것은 지금까지 일본정부가 ‘독도는 일본의 고유영토’이며 ‘영유권 문제가 미해결 상태로 남아있다’고 표현해왔던 데서 크게 후퇴한 것이다. 이처럼 일본정부와 의회의 입장이 바뀜에 따라 내년도에 간행될 『외교청서』와 『방위백서』에 독도 문제에 대한 강경 표현이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양국관계의 갈등을 예견한 듯, 미국의 대표적 싱크탱크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최근 발간한 「아미티지·나이 3차보고서」에서 “두 동맹국은 국내정치적 목적을 위해 양국 간 역사적 견해 차이를 부활시키고 국수주의적 감정을 이용하려는 유혹을 떨쳐내야 한다.”고 권고하면서, “이런 행동은 한국과 일본 지도자들은 물론 양국 국민으로 하여금 공동의 전략적 우선순위를 위해 행동하기보다는 감정싸움으로 주의를 분산시킬 뿐”이라며 “북한의 호전성과 중국의 부상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러한 권고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미국은 과거사문제에 대한 한국국민들의 감정과 일본의 그릇된 태도를 지나치게 쉽게 본 것 같다. 미 국무부가 종군위안부를 ‘강요된 성노예’로 부르며 일본정부의 책임 있는 조치를 촉구했음에도 불구하고 현 일본내각은 오히려 1993년의 ‘고노 담화’마저 부인하는 퇴행적인 자세를 보였다. 이처럼 일본은 오랜 동안 어렵게 공들여 쌓았던 한일 양국 간의 신뢰를 일거에 허물어 버렸다. 최근 일본의 우경화 움직임으로 볼 때 차기 일본정부가 다시 사죄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이러한 이슈 때문에 전쟁하지는 않겠지만”(아미티지·나이 3차보고서) 상당 기간 한·일 양국의 신뢰관계가 회복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진정성 있는 한·일 간 군사협력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 협력을 지속하면서도 중장기적으로 한·미·일 삼각군사협력을 통해 중국을 견제하려던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은 재검토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제부터 한국의 전략가들도 일본이 포함된 한·미·일 삼각군사협력에 매달리기보다는 중국도 포함된 지역안보협력을 구축하는 방향으로 우리의 외교안보전략을 모색해 나가야 할 것이다.

    
동북아안보포럼으로 우리 안보환경을 근본적으로 개선 

 

이미 일본은 8년 전부터 『방위백서』를 통해 독도영유권을 주장해 왔고, 최근에는 적반하장 격으로 우리나라의 『외교백서』에 있는 독도 표기까지도 시비를 걸고 있다. 이렇게 된 이상, 독도문제가 한·일 양자 간에 외교적으로 해결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일 두 나라의 국민들은 평화와 번영이라는 미래를 위해 함께 손잡고 나아가야 할 숙명적인 이웃이다. 한·일 양자 사이의 갈등 국면이 장기적으로 지속된다면 어느 쪽에도 득 될 게 없다. 사실 중국의 부상으로 동아시아 질서의 새판짜기가 진행되는 가운데 한국의 새로운 역할을 고심해야 할 시점에서 한·일 간의 갈등 관리에 역량을 소모해야 한다면 스스로의 발목을 묶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한·일 간 갈등 해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다자적 해법들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로 일본정부가 제시한 독도문제의 국제사법재판소(ICJ) 공동제소 방안과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때에 정한 「분쟁해결에 관한 교환 공문」에 근거한 ‘조정’ 방안이 있다. ‘조정’ 방안은 재판과 달리 조정자나 조정절차는 당사자들이 결정하게 된다. 일본이 제시한 두 방안은 모두 독도가 분쟁지역임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이 받아들일 수 없다.

 

둘째로 「아미티지·나이 3차보고서」가 제안한 것으로, 과거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미·일 3국이 비공식 협의채널을 확대하는 방안이 있다. 이러한 한·미·일 비공식 협의채널은 과거사문제의 해결책을 모색하려는 것이라기보다 ‘중국 견제’라는 더 큰 목표를 위해 한·일 양국이 ‘주변적 사안’인 과거사문제를 잠시 접어두자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과거사문제를 ‘핵심사안’으로 인식하는 한국과 달리 미국과 일본이 ‘주변적 사안’으로 인식한다는 점에 뜻을 같이하고 있어, 결국 이 협의채널은 미·일 두 나라가 한국을 설득하는 장이 될 가능성이 높아 바람직하지 않다.

 

셋째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타이완의 마잉주 총통이 제시한 독도, 조어도 문제를 함께 묶어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져가는 방안이다. 8월 21일 마잉주 총통은 일본 NHK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이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하자고 한국정부에 제안한 사례를 거론하면서 “이 같은 방식으로 댜오위다오 문제를 처리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제안했다. 현재 한국이 독도 영유권 분쟁을 인정하고 있지 않듯이, 일본도 조어도 영유권 분쟁을 인정하고 있지 않다. 이는 타이완으로선 손해 볼 게 없는 방안이겠지만, 한국은 명분상으로도 실질상으로도 고려될 수 없는 방안이다.

 

한·일 간의 갈등을 한·일관계에 집착하지 말고 동북아지역 차원에서 푸는 방법이 있다. 현재 일본은 한국과는 독도, 러시아와는 남쿠릴열도, 중국·대만과는 조어도 문제로 갈등하고 있다. 이처럼 일본은 해양국경을 접하고 있는 국가들과 예외 없이 영유권 분쟁을 겪고 있다. 그런 점에서 동서유럽의 국경분쟁을 처리했던 헬싱키프로세스 방식을 동북아에 적용할 필요가 있다. 현재 동북아 국가들 간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안보현안은 북핵문제와 해상영토 확정문제이므로, 역외국가인 미국도 포함하는 동북아안보포럼을 개최하여 이 문제들을 협의해 나가는 프로세스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

 

일본이 주변국 모두와 해상영토로 갈등하고 있는데, 그 원죄는 주변 영토를 강제로 자국 영토로 편입한 과거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정책에 있다. 유럽이 동서 간 긴장을 완화하고 협력안보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전범국이었던 독일이 침략에 대해 사과하고 체코, 폴란드, 옛소련과 국경문제를 전향적으로 풀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동서유럽은 유럽안보협력체(CSCE)를 만들어 긴장완화에 성공했다. 이 지역에서도 동북아안보포럼을 발족하여 일본이 전향적인 태도를 갖고 북핵문제와 함께 해상영토문제의 해결에 임한다면, 역내 안정은 물론 동북아지역의 평화와 번영을 촉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대결과 분쟁의 주변정세가 우리의 안보와 국익에 위배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남북관계를 비롯하여 주변국들과의 관계를 대화와 타협으로 풀어나가는 선순환으로 가져가야만 새로운 세기를 주도할 수 있다. 이제 편협하고 편 가르기 외교안보전략을 벗어나 보다 넓고 큰 시각으로 동아시아공동체의 기반을 강화하는 일에 나설 때이다. (이 글은 평화재단 현안진단 제56호에 게재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