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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평화

막힌 남북관계 뚫는 광복절 경축사를 바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그 날 우리는 제대로 된 경축행사를 열지 못했다. 당시 일본 관헌이 여전히 행정과 치안을 맡고 있었고, 미군 진주 이후에도 마지막 총독이었던 아베 노부유키와 일본군은 거의 한 달이 지난 9월 12일이 돼서야 철수했다. 이후에도 신탁통치 논란과 좌우대립으로 국내 정치권이 분열되어 거국적인 광복 경축행사가 가능해진 것은 1947년 해방 2주년 기념행사가 처음이었다.

 

8․15 광복절 경축사 연대기(年代記)

 

 사실상 첫 기념식인 2주년 행사는 지금은 철거된 서울운동장에서 열렸다.  북한 정치지도자는 불참했지만 테렌티 스티코프 소련군 중장도 참석했다. 남한 정치 지도자로 이승만․ 김구․ 서재필 등이 단상에 앉았다. 우선 존 하지 미군 소장이 축사를 했고, 이어 서재필은 기념사를 통해 “해방 2주년을 맞는 오늘 완전 독립을 하지 못하고 있음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당파를 초월해 먼저 국권을 완전하게 회복해야 한다.”라고 내외에 호소하였다.

 

 1948년 3주년 행사는 정부수립 행사와 겹쳤고 이승만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우리는 북편(北便)을 바라보고 원감(怨感)을 금(禁)할 수 없다.” 라고 하며 정부 출범의 기쁨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광복을 이루지 못한 비분함을 토로했다. 이후 매년 광복절 대통령 경축사는 자주독립의 의의를 상기하고 평화통일을 조속히 완수하여 완전한 광복을 이루자는 결의를 담아왔으며, 통일정책 내지 대북 메시지를 공표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어 왔다.

 

 지난 65차례 광복절 경축사 중에 비중 있는 메시지를 담은 사례만도 나열하기 힘들 정도다.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은 평화통일구상을 천명하였으며, 1990년 노태우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을 제의, 1995년 김영삼 대통령의 경우 평화정착 기본원칙을,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대북정책 3대 원칙을 발표한 것 등이 대표적이다. 이명박 대통령도 2009년 한반도 신평화구상, 2010년 3대 공동체 통일구상과 통일세 도입 필요성을 제시하였다. 그런 만큼 통일문제와 관련해 해마다 광복절 경축사가 내외의 주목을 받아 왔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들 경축사 중에는 광복의 진정한 뜻을 새롭게 다짐하거나 한반도 평화와 남북관계 발전에 실질적 진전의 계기가 된 의미 있는 사례도 있었지만, 당위만을 나열하면서 말의 성찬(盛饌)으로 끝난 경우가 많았다. 되돌아보면 정세 여건과 맞지 않는 메시지도 있었고 더러는 진정성을 의심받는 것도 있었다. 더구나 최근 남북관계의 부침이 반복되고 경색국면이 거듭되어 국민들이 피로감과 실망감에 빠지면서 광복절 경축사 그 자체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2011년 광복절 경축사와 2012년 북한의 수해 

 

 작년 광복절 경축사의 대북정책 메시지는 아래 9개 문장에 모두 담겨 있다. 

 

  “우리는 아직 민족사의 가장 큰 숙제를 풀지 못했습니다.
   통일은 겨레의 소원입니다.
   통일은 광복의 완성입니다.
   지난 60년 동안 남과 북은 대결의 시대에 살아왔습니다.
   이제 평화와 협력의 시대를 열어야 합니다.
   책임 있는 행동과 진정한 자세로 상호 신뢰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도발을 통해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신뢰를 바탕으로 평화를 이루고 협력하여 번영의 길로 함께 가야 합니다.
   어린이를 위한 인도적 지원과 자연재해에 대한 인도적 지원은 계속해 나갈 것입니다.“

 

 남북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어 있는 상황임에도 상호 신뢰구축이 필요하다는 당위(當爲)와 북한의 도발에 대한 경고(警告)라는 선언적 메시지와는 별개로 ‘수해 지원에 대한 인도적 지원은 계속할 것’이라는 실천적 메시지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지난 8월 4일 조선중앙통신은 북한에서 태풍 등으로 6월부터 7월까지 발생한 홍수로 169명이 사망하고, 144명이 부상을 당했고, 400명이 실종됐다고 보도했다. 이재민이 20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수해피해 지역의 영상도 공개했는데, 안주시내 민가가 지붕까지 물에 잠기고 도로와 교량이 파괴된 장면과 침수된 농지를 바라보는 주민들의 허탈하고 처량한 모습이 담겼다.

 

▲ 북한이 최근 국제단체에 공개한 태풍과 홍수 피해 지역. (연합뉴스)

 

 북한의 계속된 도발에 따른 경색국면에서도 자연재해에 대한 대북 인도적 지원은 계속하겠다는 작년 광복절 경축사를 잊은 국민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광복절 경축사의 메시지라는 역사적 무게와 대통령의 발언이라는 비중을 감안하여 정부는 수해발생 직후 바로 행동에 나섰어야 했다. 그래야 남북 간 신뢰회복 필요성이라는 당위의 메시지도 대남도발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도 그 실천의지가 함께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막힌 남북관계 뚫는 광복절 경축사를 바란다 

 

 그동안 이명박 정부는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발전시킬 의사는 없고 북한 핵문제와 대남도발을 빌미로 대북압박을 강화하면서 북한체제의 붕괴를 도모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아 왔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의 대남도발에 대한 대응이 북한에 대한 도발로 이해되고, 이에 맞선 북한의 대응이 또다시 대남도발로 이어지는 불신 심화의 악순환이 형성되었다

 

 정부도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기회 있을 때마다 북한을 해칠 의사가 없다는 점을 반복해서 밝히고는 있다. 작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남북 간 상호 신뢰구축이 중요하다는 당위를 새삼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해석하고 싶다.

 

상호 불신의 고리를 끊는 계기는 북한 수해 지원

 

 북한이 수해를 당한 것은 안 된 일이지만, 우리의 행동에 따라 남북 간 신뢰회복을 위한 계기가 되어 줄 수도 있다. 남북관계가 최악인 상황에서도 수해지원의 용의가 있다고 밝힌 작년의 광복절 경축사가 말 그대로 이행된다면 대남도발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도 신뢰회복을 위한 당위의 메시지도 그 진정성이 보다 충실히 전달될 것이다.

 

  2012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남북관계의 국면전환을 위한 중대한 메시지가 담긴다면 좋은 일이다. 시중에는 이에 대한 기대와 요구도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제안에 앞서 작년 경축사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어떤 획기적 메시지도 진정성을 확보하기 어려울 것이다.

 

 남북관계의 혈로가 막혀 있으면 민족공동체 안에 잔병이 잦아진다. 뿐만 아니라 대외관계에서도 제대로 목소리를 못 내고 쓸데없는 곳에 역량을 소진하게 되며, 우리가 지향하는 통일한국에의 방향타마저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그렇기에 막혀 있다면 반드시 뚫어야 한다. 그동안 너무 오래 막혀 있었으나 북한의 수해는 이를 타개할 충분한 명분을 주고 있다. 정부는 아무런 조건 없이 대규모 대북 인도적 지원 의사를 밝히고 이를 즉각 실행에 옮기기를 바란다. 이렇게 될 경우 남북 간 상호불신이라는 악순환의 고리가 자연스럽게 끊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소위 ‘원칙 있는 대북정책’이라는 것이 대북 압박의 명분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진정성을 확보하는 방법은 이제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그리고 시간도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이명박 정부 대북정책이 가시적 성과는 남기지 못했다 하더라도 정책의도의 진정성은 평가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67주년 광복절 경축사가 남북관계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 글은 평화재단 현안진단 제55호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