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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평화

대북 식량지원이 최고의 심리전이 되는 이유

 최근 북한 관리들이 세계 도처에서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분주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북한은 현재 세계 40여 개국에 식량 지원을 요청한 상태이며, 지난 3월 말 영국을 방문한 최태복 최고인민회의 의장은 "북한을 강타한 60년 만의 최악의 한파와 지난해 수확량 부족으로 앞으로 두 달이 고비"라며 식량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실제로 세계식량기구(WFP)는 현지방문(2.21~3.11) 조사결과를 발표하며 북한주민 600여만 명이 굶주림에 직면해 있다며 43만 톤의 식량을 긴급히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권고했다. WFP는 북한 식량상황에 대해 "혹한을 지내면서 감자와 밀 같은 겨울 농작물 생산에 영향을 받았고, 이는 만성적인 식량부족 상황 중에서도 최고 수준"이라며, "2010년 11월 WFP가 북한에 86만 7천 톤의 식량이 부족하다고 발표한 바 있지만 이번 겨울로 100만 톤 이상 식량부족 현상이 발생했다"고 진단했다.

 

국제사회의 대북 식량지원 움직임

 이러한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4월 7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미국 의회를 방문해 존 케리 상원 외교위원장과 면담한 뒤 "북한의 악화된 식량 사정에 깊이 우려하고 있다"면서 "남북 간 정치적 긴장에도 불구하고 한국정부가 식량지원을 긍정적으로 검토할 때가 된 것 같다"는 입장을 밝혔다. 미국 내 반응은 다소 엇갈리기는 하지만, 미국 정부는 대북 식량지원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WFP 조사와는 별도로 정부 차원의 조사단을 직접 북한에 파견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과 북한은 2008년에 분배감시에 관한 원칙에 이미 합의한 바 있어 일부 수정 가능성은 있지만, 북한과 다시 협상할 필요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 2월 1일 '미국의 소리(VOA)' 방송은 북한이 미국에 2009년 중단된 식량지원 사업의 재개를 요청하면서 미국 정부의 분배 감시 요구를 받아들일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고 보도했다. 스티븐 보즈워스 미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도 최근 미 상원청문회에서 "적절한 모니터링과 지원식량의 전용 여부를 확인할 방법이 보장돼야 한다"는 식량지원 재개의 기준을 밝힌 바 있다.

 그런 가운데 4월 26일부터 2박 3일 동안 카터 전 대통령은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 메리 로빈슨 전 아일랜드 대통령, 그로 할렘 브룬트란트 전 노르웨이 총리 등 국제사회의 원로들과 함께 북한을 방문하여 북한 고위인사를 만날 예정이다. 미 국무부는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이 사적인 것이며 미국 정부의 어떤 메시지도 갖고 있지 않다고 선을 긋고 있지만, 카터가 미국 민주당 정부에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라는 점에서 오바마 행정부의 암묵적인 동의와 지지 없이 움직인다고 보기는 어렵다.

 카터 전 대통령은 1994년 1차 북핵 위기 때와 지난해 평양을 방문해 북미관계의 변화를 이끌었던 경험이 있다. 지난 해 카터의 방북 때 김정일 위원장의 방중으로 만남이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이번 방북 때는 김 위원장과 만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인다. 김 위원장과의 면담이 이루어진다면 북한의 대미 메시지가 무엇인지 분명해 질 것이다.

 지난 4월 4일 2012년 재선 도전을 공식 선언한 오바마 대통령으로서는 지금까지 골칫덩이였던 북한문제가 중동문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예측 가능한 현안이기 때문에 오히려 외교적 성과를 낼 수 있는 과제로 보고 적극적인 태도로 나올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그간 후순위로 밀려 있던 북한문제의 우선순위가 높아지고, 대북 협상 분위기 조성을 위해 식량지원이 이루어질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지게 될 것이다.

북한 식량난을 둘러싼 논쟁 아닌 논쟁

 이와 같은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움직임과 달리, 국내에서는 북한의 식량난을 둘러싸고 논쟁 아닌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현재 북한의 식량지원 요구가 당면한 식량난을 벗어나기 위한 것인가? 내년도 김정은 후계체제의 출범을 성대하게 치루기 위해 식량을 비축하기 위한 쇼에 불과한 것인가?

 국내 일부 시민단체들은 북한의 식량사정이 매우 좋지 않으니 인도적 차원에서 대북 식량지원을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북한의 식량난이 예전보다 심각하다면서 조속히 대북 인도적 지원을 실시하라고 요구한다. 만성적인 경제난에다가 이번 겨울에 발생한 이상한파로 인해 한계상황에 있는 북한주민들부터 아사자가 대량 발생하는 사태가 재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다른 북한 관련 일부 단체들은 북한의 식량사정이 그리 나쁘지 않으며 현상적으로 보이는 식량부족 현상이 내년도 김정은 후계체제의 정식 출범에 맞춰 식량을 풀기 위해 비축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어떤 정치인은 북한이 군량미 100만 톤을 비축해 놓고도 주민들을 위해 풀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북한이 해외공관까지 동원해 국제사회에서 식량을 모으는 것은 내년 4월 김일성 주석 100주년 생일에 맞춰 3대 세습을 위한 특별 식량 배급 이벤트를 벌이려는 의도라는 것이다.

 우리 정부의 입장은 아직 단호하다. 천안함, 연평도 사태에 대한 북한의 책임 있는  행동이 없는 상황에서 국제사회의 대북 식량지원에 동참하는 것은 어렵다는 입장이다. 정부 당국자는 "정부 차원의 대규모 식량지원은 분배 투명성과 함께 천안함, 연평도 사건에 대한 북한의 책임 있는 조치 등 남북관계 상황 등을 고려해 검토할 것이라는 점을 WFP 측에도 밝혔다"고 언급했다.

 이처럼 시민단체들이나 정부가 식량부족의 원인에 대해서는 달리 보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현재 북한주민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인식을 같이 하고 있다는 점이다. 수확량이 줄었기 때문이든 군량미 비축을 위한 것이든, 김일성 주석 100주년 생일이나 김정은 후계체제의 출범에 맞춘 것이든, 어느 쪽도 현재 북한주민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부정하고 있지는 않다.

 따라서 북한주민의 굶주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투명성을 전제로 하여 한국을 포함한 국제사회가 북한에 대규모 식량지원을 제공하거나, 아니면 북한당국이 비축해 놓은 것으로 추정되는 식량을 주민들에게 풀어 내놓도록 외부에서 압박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러나 북한당국으로 하여금 비축식량을 풀도록 압박하는 방법은 역사적 경험으로 볼 때 북한주민의 굶주림 문제의 해법이 될 수 있을 지 미지수이다.

 결국 북한당국이 스스로 비축식량을 풀지 않는 한, 우리 정부나 미국을 포함한 국제사회가 식량지원을 통해 북한주민의 굶주림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옳은 길이다. 그렇다고 해도 여기에는 두 가지 조건이 제시되어 있다. 하나는 분배투명성에 대한 보장 조치이고, 다른 하나는 천안함, 연평도 사건에 대한 북측의 책임 있는 행동이다. 전자는 국제사회가 제시하는 일반적인 요구인 반면, 후자는 남북관계에서 오는 특수한 요구이다.

 그런데, 얼마 전 북한을 다녀온 재미학자 박한식 교수는 '천안함 사태는 자신들이 저지른 게 아니므로 절대로 남측의 사과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고 전한다. 북한이 분배투명성을 받아들이면서도 천안함, 연평도 문제에 대한 태도변화를 보이지 않는 상태가 지속될 경우에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대북 식량지원이야말로 최고의 심리전

 우리 정부는 천안함 사태에 대한 대북 조치의 일환으로 이른바 '5.24조치'를 철회하지 않는 한 절대로 대북 식량지원을 할 수 없는 것인가? 정부가 내놓은 '5.24조치'의 의도는 대북 지원을 통해 북한체제가 강화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벌을 받아야 할 대상에게 상을 줄 수 없다는 뜻이리라. 하지만 대북 식량지원이 과연 북한체제의 강화에 기여하는 것일까. 분배투명성이 개선되어 우리가 제공하는 식량이 북한주민에게 분배되어 굶주림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 과연 김정일 체제의 유지, 강화에 도움이 되는 것일까.

  일각에서는 설사 우리가 지원하는 식량이 북한주민에게 분배되더라도, 그만큼 군량미로 징발되어 없어지기 때문에 북한군에게 돌아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대북 식량 제공이 가장 효율적인 심리전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에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지난 4월 5일 국회에서는 '5.24조치'에서 대북 심리전을 천명한 것이 정전협정 위반의 소지가 없는지를 따져 묻는 대정부 질문이 있었다. 이것은 군이 공공연하게 대북 전단살포를 실시한 데 대한 문제제기였다. 이에 대해 김관진 국방부 장관은 “심리전은 작전기능의 하나이지만 정전협정에는 심리전에 대한 규정이 없다”며 대북 심리전이 정전협정 위반이 아니라는 취지로 답변했다.

  심리전이 정전협정 위반이 아니라고 한다면 국방부나 합참에 대북심리전을 전담하는 부대를 보유하거나 그 부대가 정례적으로 훈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국방부가 밝힌 심리전 수단인 전단 살포, FM방송, 확성기 방송은 우리가 북한에 대해 지킬 것을 요구하고 있는 남북기본합의서를 깨트리는 동시에 북한의 군사적 대응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에서 보다 신중할 필요가 있다. 북한당국은 우리 쪽에서 대북 심리전을 전개할 경우에 심리전 발원지를 조준 격파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이 때문에 대북 확성기 방송은 11곳에 설치해 놓고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미 국방부는 심리전(Psywar)에 대해 “국가목적의 달성을 지원하는 방법으로 적대세력의 여론, 감정, 태도와 행동에 영향을 줄 것을 1차적인 목적으로 하는 선전 및 여타 심리적 행동의 계획된 사용”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심리전도 적대세력 간 전쟁의 한 형태인 셈이다. 이 심리전에는 기만이 포함된 회색(Grey), 흑색(Black) 심리전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남북한이 현재와 같이 정전체제하에서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가장 효과적인 심리전 방법은 북한주민에게 외부세계의 진실을 당당하게 알리는 백색(White) 심리전이다. 그런 점에서 대북 식량지원은 남한체제의 대북 경제적, 도덕적 우위를 알릴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심리전 수단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제공한 식량을 먹으면서 북한주민들은 끼니도 제대로 못 챙겨주는 북한체제와 동포애를 바탕으로 이념과 체제의 차이를 넘어 먹을 것을 나누어주는 남한체제를 확연하게 비교인식하게 될 것이다. 설사 우리가 제공하는 식량이 군량미로 전용된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남쪽에서 제공하는 식량을 받아먹는 북한군의 입장을 생각해 보라. 북한군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들이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남측으로부터 식량을 얻어먹는 형편에서 과연 제대로 전의(戰意)가 불살라지겠는가?

  민간단체들의 풍선을 통한 대북 전단 살포는 이미 남북갈등을 넘어 남남갈등을 야기하고 있다. 대북 전단 살포가 북한 당국이 원하는 남남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는데다가, 북한지배층으로 하여금 체제옹호에 매달리게 하는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우리 정부가 진정으로 북한주민을 상대로 심리전의 효과를 거두겠다면, 대북 전단살포를 재개하거나 대북 스피커방송을 실시하는 것보다 북한에 대규모의 식량을 제공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비록 많이 늦었고 낮은 수준이지만, 지난 3월 31일 통일부가 식량지원 문제와는 별도로 국내 민간단체들의 북한 취약계층에 대한 순수 인도적 지원을 허용한 것은 잘 된 일이다. 통일부는 이런 방침의 일환으로 유진벨 재단이 신청한 내성결핵약 3억 3600만 원 규모의 물품에 대한 대북 반출을 승인했다. 비록 '5.24조치'의 범위 내에서 이루어진 것이지만, 앞으로 이를 뛰어넘는 대북 식량지원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 이 글은 평화재단 현안진단에 기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