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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스님 즉문즉설

김여진이 묻다, 법륜스님도 때로는 외롭나요?

최근 반값등록금 문제를 이슈로 만들며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배우 김여진. 막힘없는 즉문즉설로 많은 이들을 행복의 길로 이끌어 주고 계신 법륜스님. 이 두 분이 만나 2030 청춘들과 행복에 대해 진솔한 대담을 나누었습니다. 평화재단에서 열린 청년열린아카데미 강좌에서 배우 김여진과 법륜스님이 나눈 이야기를 재미나게 엮어 보았습니다. 바쁜 일상을 내려놓고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내려 가 보세요.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에 대해 편안하게 되돌아볼 수 있어 너무나 유익했던 시간. 김여진의 솔직 담백한 질문에 법륜스님의 지혜로운 답변이 명품이었습니다.^^

 

때로는 스님도 외롭다

김여진 : 오늘 만나볼 분은 평화재단 이사장님이시자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 가장 앞장서고 계신 법륜스님이십니다. 스님은 16년 전부터 인도의 불가촉천민 마을인 둥게스와리에 수자타 아카데미를 설립하신 것을 시작으로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아프가니스탄, 필리핀 등 주로 아시아 지역 제3세계의 구호 활동을 펼치고 계십니다. 그 밖에도 굉장히 많은데요. 일단 효율적으로 질문하기 위해 OX 퀴즈로 시작하겠습니다. OX 퀴즈가 몇 개 안 됩니다. 빨리 대답해주셔야 합니다.

출가한 것 후회해본 적 있다. ○
스님도 때로는 외롭다. ○
성공보다 실패를 더 많이 해봤다. ○

출가한 걸 후회해 본 적 있다는 말씀이 놀랍네요. 일단 스님께서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기본적으로 알아봤고요. 스님께서는 아마 여기에 대해서 뭔가 설명이나 해명을 하실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대답하셨을지 모르겠지만, 아닙니다! 그냥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스님께서는 2008년에 70일 단식을 하신 적이 있으십니다. 저는 세 끼도 못 굶는데 스님은 당시 북한 동포들의 굶주림을 세상에 호소하기 위해서 함께 굶으셨습니다. 그때 단식하는 모습을 보면서 큰 감동을 받게 되었고 그 일이 계기가 되어 지금까지 스님을 존경하고 있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왜 저러실까?’

무슨 얘긴가 하면 우리는 정말 밥 한 끼만 굶어도 큰일 나잖아요. 그런데 내 문제도 아닌 다른 사람들 때문에, 더군다나 가족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 북한 사람들을 위해서 ‘왜 저렇게까지 마음을 내실까’, ‘저게 어떤 마음일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되었고, 나중에는 ‘정말 스님은 행복하실까’, ‘과연 좋아서 저러실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스님께서 생각하는 행복이란 무엇인가요? 우리가 알고 있는 쾌락이나 즐거움과 어떻게 다른가요?

‘기분 좋음’을 행복으로 삼으면 ‘기분 나쁨’도 따라온다

법륜 : 행복이란 게 뭘까요? 기분 좋은 것 아니겠어요? 굶다가 밥을 보면 기분이 좋죠. 산에 올라가서 주변 풍광을 보면 기분 좋을 때도 있고 또 보고 싶은 사람 만나서 기분이 좋을 때도 있어요. 이 ‘기분 좋은 것’이 우리가 보통 말하는 행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분이 좋다는 게 꼭 돈이 많았을 때만 생기고, 지위가 높았을 때만 생기고, 인기가 있을 때만 생기느냐, 이런 논리에 대해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아주 가난하게 살다가 돈 몇 백만 원을 벌어서 집 근처에 비닐하우스를 한 채 지었어요. 그러고는 기분이 좋아서 “세상이 다 내 것 같다!”며 행복을 만끽하는 경우가 있어요. 반면에 재산이 몇 백억이나 되는 어떤 사람이 있는데 주식 폭락으로 망했다며 자살했어요. 나중에 남은 재산을 정리해보니 십 몇 억이 됐답니다.

결국 기대가 크면 조건이 아무리 좋더라도 만족도가 떨어져서 ‘기분 좋음’이 안 일어나고, 반대로 기대가 낮으면 조그마한 일에도 만족도가 커져서 ‘기분 좋음’이 생긴다는 것이죠. 외부에서 어떤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만 행복을 느끼는 게 아니라 자신의 마음가짐이 어떤가에 따라 행복감이 결정된다고 할 수 있어요.

오늘날 GDP를 계산하면 잘사는 나라부터 순위가 결정되는데 그 순위가 사람들의 행복도를 조사한 결과와는 일치하지 않습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도 행복감을 느끼며 살 수가 있어요. 예를 들어 나같이 혼자 사는 사람이 나이 들어 나이 든 할머니와 같이 살면 기분 좋을 수가 있겠죠. 반대로 어떤 사람은 천하절색의 미인과 살면서도 괴로운 사람이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행복이라는 것은 외관상 주어진 조건만 갖고 이뤄지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바깥으로 기울이는 노력도 필요하지만 자기 내면에 좀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오늘날의 사회는 행복을 얻기 위해 밖으로 기울이는 노력만 있다는 게 문제예요. 사람들이 바깥으로는 많은 힘을 쏟지만 실제로 행복을 얻는 사람은 적어요. 오히려 자기 쪽으로 향하는 마음의 작용 원리를 이해하여 스스로를 비우는 노력을 하는 것이 행복지수를 높이는 데, 훨씬 더 효과적입니다.

김여진 : 그러면 스님께서는 늘 행복하신가요?

법륜 : 행복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어요. 방금 얘기한 대로 ‘기분 좋음’을 행복으로 삼는 게 세상에서 말하는 행복입니다. 그런데 ‘기분 좋음’을 행복으로 삼으면 그 이면에 ‘기분 나쁨’이라는 게 늘 따라다니게 됩니다.

불교에서 수행을 함으로써 행복을 생각하는 것, 소위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기분 좋음’과 ‘기분 나쁨’을 다 뛰어넘는 걸 추구해요. 기분이 좋았다가 기분이 나빴다가 하는 것을 우리는 윤회라고 하는데 여기로부터 벗어날 때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느끼는 행복은 여러분이 ‘아, 기분 좋다!’ 하는 상태의 지속과는 다른 것입니다.

세상에서 일을 도모하다 보면 내 뜻대로 되어서 기분 좋을 때도 있고 또 그렇지 않을 때도 있어요. 이때 저는 어디에도 크게 연연하지 않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나아갑니다. 그러니 바깥에서 볼 때 스님이 행복한 것 같다, 아닌 거 같다 하는 것과 제가 추구하는 행복의 성격이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지요.

외롭거나 또는 외롭지 않거나

김여진 : 스님 말씀 중에서“혼자 있을 때는 외롭다고 하고, 같이 있을 때는 귀찮다고 하는 게 우리네 마음이다.” 하는 법문을 많이 들었습니다. 들을 때마다 ‘참 내 얘기 같다, 너무 맞는 말씀이다, 그런데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특히 책도 보고 공부도 하면서 혼자 있는 걸 즐기다가도 그 시간이 좀 오래될 때 그렇더라고요. 사실 제가 연기자라서 연기 안 하고 집에 있을 때는 두 달도 넘게 혼자 있을 때가 있거든요. 누구와도 말도 안 하고 혼자 있는 거죠.

아주 오랜 시간 혼자 있게 될 때, 너무 오랫동안 연인이나 친구가 없을 때 누구라도 정말 외롭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또 직장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 중에 싫은 사람이 있다면 볼 때마다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함께 있으면서 즐거울 수 있는 방법이 도대체 뭘까요? 비결이 있다면 구체적으로 듣고 싶습니다.

법륜 : 혼자 있으면 편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외롭기도 하지요. 또 같이 있으면 즐거울 때도 있지만 때로는 귀찮을 때가 있습니다. 이건 누구나 다 겪는 거예요. 그런데 혼자 있으면서 외로울 때 그 외로움을 누군가를 만남으로써 해결하게 되면 둘이 있는 시간이 좀 길어질 때 또 귀찮음이라는 게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 헤어지게 되면 이제 귀찮음은 없어지는 대신에 시간이 경과하면서 또다시 외로움이 생기겠지요.

그런데 이 외로움을 만나서 해결하지 말고 한번 지켜보는 겁니다. 하루, 이틀, 열흘 이렇게 지켜보세요. 그러다 보면 안 만나고도 이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가 부지불식간에 찾아오겠죠. 반대로 두 사람이 같이 사는데 귀찮단 말이에요. 이것을 헤어지는 걸로 해결하지 말고 귀찮아하는 마음을 가만히 지켜보세요. 그러다 보면 스스로 헤어질 핑계를 교묘하게 댑니다. 보통 ‘성격이 나빠서 헤어져야겠다’, 이렇게 생각하다가 ‘그래도 자식 때문에 살아야지’, 이렇게 생각하다가 나중에는 ‘애 교육을 위해서라도 헤어져야 되겠다’ 또 이렇게 바뀝니다.

이게 교묘하게 헤어질 수밖에 없도록 자꾸 몰아가요. 한번 그쪽으로 사고가 움직이면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결국은 그렇게 하고야 마는 쪽으로 움직이죠. 이때는 헤어지지 말고 그냥 놓아둔 다음에 자기 마음이 증폭되는 걸 지켜보면 안 헤어져도 이 마음이 항상 지속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어느 정도 사라졌다가 또 일어나고, 사라졌다가 또 일어나고, 사라졌다가 일어납니다. 그러면서 시간이 흐르면 같이 사는 삶 속에서도 이전에는 못 견뎌했던 일들이 점점 약해져서 귀찮은 느낌이 줄어드는 거죠. 이러면서 함께 살아도 괜찮은 경지로 나아가게 됩니다. 함께 사는 게 정말 좋고 즐거운 그런 경지까지는 아니더라도 도저히 못 살 것 같은 상태는 극복할 수 있어요. 마찬가지로 혼자 사는 게 즐거운 경지가 되지는 않더라도, 혼자라서 외로워 못 견딜 것 같은 상태는 극복할 수 있어요.

이렇게 되면 혼자 있어도 괜찮고, 또 혼자 있다가 둘이 되어도 괜찮은 거죠. 혼자 있을 땐 혼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고, 누가 찾아오면 또 그 사람과 같이 하는 일들을 하면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자유가 늘어나게 되는 거죠.

‘혼자 있는 것은 항상 즐겁고 기분 좋다’는 느낌이 계속 유지하려고 할 때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혼자 있는데 어떻게 항상 기분이 좋겠습니까? 기분은 늘 변하는 것이지요. 둘이 있을 때의 즐거움 또한 계속 유지될 수 없지요. 그런데 우리는 변하는 기분을 변하지 않기를 바라지요. 사실 거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추구하는 행복은 ‘기분 좋음’인데, 이 ‘기분 좋음’을 행복으로 삼는다면 그 ‘기분 좋음’은 항상 할 수가 없으므로 곧 ‘기분 나쁨’으로 바뀌게 되니 불행도 함께 따라다니지요. 그렇기 때문에 행복과 불행의 고리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같이 있어도 귀찮지 않고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은 쪽으로 나아가야 해요. 그래야 세상에서 말하는 ‘자유’나 ‘행복’과는 차원이 다른 상태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똑같은 용어로 둘을 ‘행복’이라 하고 ‘자유’라고 부르다 보니까 앞의 세계와 뒤의 세계는 차원이 다른데 자꾸 동일하게 이해하는 면이 있어요.

한 차원 다른 상태의 자유라는 것은 남의 속박에서 벗어난다는 개념이 아니라 욕구, 카르마, 내 마음으로부터 자유를 얻는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면 무리 속에 있어도 특별히 귀찮지가 않고 혼자 있어도 특별히 외롭지가 않아요. 물론 외로움과 귀찮음이 조금씩은 있겠지만 못 견딜 만큼 괴롭지는 않게 됩니다. 혹시 괴로움이 일어나더라도 잔잔한 호수의 물결 정도지 파도처럼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청중석에 앉은 20대 청춘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가득 번집니다. 스님도 때로는 외로울 때가 있는가 퀴즈 형식으로 가볍게 물었는데, 어떻게 하면 외롭지 않고 행복할 수 있는지 현답을 들을 수 있었네요. 혼자 있으면 외롭고 둘이 있으면 귀찮고 누구나 다 그럴 겁니다. 하지만 행복은 외부 조건을 변화시키는 데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주어지는 것이라는 말씀이 마음 속 깊이 남습니다. 기분이라는 것은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고 늘 변하는 것인데, 변하지 않기를 바라니 괴로울 수 밖에 없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외로울 때, 사람을 만나서 해결하지 말고 그 마음을 다만 지켜보시라. 가까이 있는 사람이 미워질 때 외면하지 말고 그 마음을 다만 지켜보시라... 지켜보면 힘이 생기면, 마음이라는 것은 일어나고 사라지고를 반복할 뿐이다. 혼자 있으면 혼자 있어서 좋고 둘이 있으면 둘이 있어서 좋은 경지로 나아가게 된다. 정말 지혜롭고 깊이 있는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오늘부터 스님 말씀처럼 가볍게 실천해 보렵니다. 지켜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