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박근혜 대통령이 유럽 순방에 앞서 한 언론사와의 회견을 통해 남북정상회담의 가능성을 열어 놓는 언급을 해 주목을 받았지만, 다음날 청와대는 이는 원론 차원의 언급이라며 확대 해석을 경계했고 통일부 장관은 “지금은 남북정상회담을 논의할 만한 시기가 아니”라고 아예 뒷걸음질을 쳤다.
상황 타개에 대한 혼란스러운 언급들
또한 통일부 장관이 최근 국정감사에서 ‘5.24조치 해제’ 등 대북정책 변화 여지로 해석될 만한 발언을 하자, 통일부 대변인은 이것도 역시 원론적 언급이라며 즉시 파문진화에 나서고 “현재 정부에서는 5.24조치의 해제를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못을 박았다.
한편 중국의 우다웨이 6자회담 수석대표가 지난달 28일과 29일에 미국의 수석대표인 글린 데이비스와 회동한 뒤 “6자회담 재개에 자신 있다”고 밝힌 데 이어 지난 4일 북한을 방문하자 일각에서는 6자회담 재개가 임박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그러나 5일 미국을 방문, 데이비스 대표를 만난 조태용 한반도 평화교섭본부장은 “실질적 비핵화를 실현하는 대화의 장이 되리라는 확신 없이 회담을 재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기존 입장에 달라진 것이 없다”며 “미국도 우리 생각과 한 치도 다르지 않다”는 점을 강조해 6자회담 재개 가능성과는 거리를 두는 태도를 보였다.
북한도 월북한 우리 국민들을 자진 송환하고 우리 국회의원들이 국정감사 기간 중 개성공단을 방문하는 것을 허용하는 등 일련의 유화적 조치를 취하기는 했지만 남북관계 개선 기대감에 찬물을 끼얹는 발언을 바로 쏟아내면서 혼란을 주고 있다.
북한은 박 대통령의 정상회담 언급에 대해서는 “진정으로 정상회담을 바란다면 올바른 예의부터 갖추라“고 비난하는가 하면, 6자회담 재개 문제와 관련 ”자신들에게 선(先) 핵폐기를 바라는 건 어리석고 우둔한 짓“이고 ”대화를 구걸하지는 않겠다“며 쐐기를 박고 있다.
이렇듯 ‘혹시나’ 하는 기대를 심어 놓고는 ‘역시나’ 하고 김을 빼는 언급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드디어 상황타개를 위한 물밑 움직임이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자신의 입장에는 변화 없이 상대방 입장의 변화를 촉구하는 기 싸움의 연장으로 보아야 하나?
‘혹시나’와 ‘역시나’의 반복 자체가 남긴 의미
상황타개를 위한 움직임이 이미 시작되었건 아직 여건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기 싸움이건 상관없이, 최근 정책변화로 해석될 만한 일련의 언급 자체만으로도 최소한 우리 정부가 결단을 내릴 시기가 다가오고 있거나 혹은 정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미 사실상 중요한 결단이 내려진 셈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김정은 제1비서와 정상회담을 할 용의가 있다는 언급이 비록 원론적인 것이라고 해도 현 상황에서의 의미는 각별하다. 김 제1비서가 3대 세습권력으로 인해 내부적 정통성 문제에 약점이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김정은 제1비서를 정상회담 파트너로 명시적으로 언급하였다. 우리가 의도하든 아니든 김정은 제1비서를 북한의 최고지도자로 공인함으로써 김정은 정권에 정치적 선물을 준 셈이다.
민주적이고 절차적인 정통성이 결여된 채 비정상적 방식으로 집권한 권력자와의 정상회담을 허용하는 것은 중요한 외교적·정치적 의미를 가진다. 과거 우리나라에서도 쿠데타로 집권한 대통령들이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추진하면서 내부적 정통성을 보완하려고 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당시 미국도 현실적으로 정상회담을 수용함으로써 한국의 새 권력자를 인정한 셈이 되었고 당사자에게 큰 정치적 선물이 된 것은 사실이다.
‘5.24조치 해제’ 언급도 이미 그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정부가 개성공단 사태의 해법으로 발전적 정상화의 방향을 천명했고 개성공단의 국제화를 주요 정책과제로 천명한 마당에, 대북 신규투자를 금지한 ‘5.24조치’와는 양립할 수 없는 선택을 한 셈이다. 개성공단 국제화를 이루려면 ‘5.24조치’를 해제해야 하고, 천안함 사건에 대한 북한의 사과를 받기 위해 ‘5.24조치’를 유지하려면 개성공단 국제화 문제는 지금 논의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니다. 또한 ‘국제화’는 개성공단이 경영 외적 문제로 중단되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취지로 추진하고 있는데 ‘5.24조치’를 유지한다고 하면 우리 스스로 경제 외적 문제에 개성공단을 결부시키겠다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최근의 6자회담 재개를 모색하는 당사국들의 움직임도 지난 여름까지의 상황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2.28 합의’가 북한의 위성발사로 무산되면서 지금까지는 각 진영의 입장을 새로이 정리하는 데 주력하였다. 반면 최근 각 진영은 구체적으로 정리된 입장을 내놓고 비록 아직 타결되지는 않았지만 중재안을 도출하려는 움직임을 활발하게 전개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직 초반이긴 하지만 인내를 가지고 몇 차례 중재안이 거듭되면 상황이 달라질 것으로 기대된다.
회담을 공식적으로 개회한 것은 아니지만 당사국들이 릴레이로 양자 또는 다자회담을 가지면서 사실상 일종의 예비회담 수준으로까지 진전되고 있는 셈이다. 지난 봄 한반도 전쟁분위기를 생각하면 상당한 진전이다. 당국자들의 언급과는 상관없이 분주한 발걸음 자체가 국면전환의 필요성에 대한 공통인식을 나타내고 있다고 보인다.
‘신뢰프로세스’의 진정한 가치는 주인의식에 있다
이제 박근혜 정부 취임 첫해가 마무리되고 있다. 정부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해설책자를 이미 내었다. 제2차 ‘남북관계발전 기본계획’도 선을 보였고 같은 시기에 우리의 6자회담 수석대표는 협상과 관련해 ‘주인의식’을 언급했다.
북한도 경제와 핵무력 건설 병진노선이라는 명분을 유지하고는 있으나, 최근 대외경제 개방과 내부적 경제 활성화에 힘을 쏟으면서 일단 핵무력 증강과 한반도 긴장 고조에 주력했던 것과는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는 우리 정부의 이니셔티브이다. 우리가 원하는 한반도 평화와 안정의 구도를 정착시키고 통일의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우리가 먼저 움직이고 주변국들의 협력과 지지를 끌어내자는 구상이다.
관련계획 수립도 끝났고 사실상 필요한 결단도 이미 한 셈이다. 그동안 경색국면을 타개하려는 움직임도 있어 왔다. 북한도 군사적 대결보다는 외교적 협상이 필요한 내부 사정에 있다.
때를 놓치지 말고 국면을 끌고 나가는 우리 정부의 적극성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신뢰프로세스’라면 말 그대로 프로세스여야 한다. 시작이 없는 데서는 과정도 없고 결과도 없다. 또 결과가 가시화되어야만 과정에 들어가겠다는 것도 프로세스라는 본연의 의미와 궤를 달리하는 것이다. 멀고도 긴 과정을 인내심 있게 이끌고 나갈 의지를 보여줄 때 ‘신뢰프로세스’의 진정성을 신뢰할 수 있게 된다.
웃으면 복이 온다. ‘복이 오면 웃자는 것’은 우리의 지혜도 정책도 아니다.
북한이 보여주는 신뢰의 수준에 따라 우리의 대응도 당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겠지만, 우리가 북한을 움직이게 해야지 북한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구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북한이 신뢰를 보이게끔 먼저 우리 쪽에서 신뢰의 발걸음을 내딛는 것을 우리의 체면손상이나 굴복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주인의식을 갖고 신뢰프로세스를 주도적으로 풀어나가는 것이 지혜로운 정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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