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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스님 즉문즉설

스님께 물었다 "성욕이 너무 강해서 고민이예요."

안녕하세요. 오늘은 경희대학교 국제캠퍼스 르네상스홀에서 청년들을 위한 즉문즉설 강연이 열렸습니다. 건물이 아주 웅장했는데, 수원 청년정토회 봉사자들은 큰 기둥마다 한 명씩 포스터를 들고 서서 찾아오는 청중들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저녁 7시가 되자 400여 명의 청년들이 자리를 가득 메운 가운데 소개 영상과 함께 즉문즉설 강연이 시작됐습니다. 영상이 끝나고 스님이 무대로 걸어나오자 청년들은 큰 함성과 박수갈채로 환영했습니다. 

 

 

스님은 거두 절미하고 곧바로 질문을 받았습니다. 총 7명이 스님에게 질문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성욕이 너무 강해서 고민이라고 질문한 20대 남성 분의 질문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 욕망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에 대해 솔직한 질문과 스님의 명쾌한 답변이 어우러지면서 아주 재미있고 유익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저는 성적인 욕망이 너무 강해서 고민입니다. 저도 남자라 성적인 욕망이 있고, 그래서 사실 군대 제대 후에는 많은 여성들과 만나서 놀아도 봤습니다. 가슴이 깊게 파인 옷이라든가 핫팬츠를 입고 다니는 여성들을 보면, 특히 몸매가 예쁘거나 얼굴이 예쁘면 제 눈이 자연스럽게 그 여성들을 향해 돌아갑니다. 

 

그런데 계속 이렇게 살고 싶진 않습니다. 저는 여태껏 그런 여성들에게 적극적으로 대쉬도 해 보고 그랬지만 결과적으로 그냥 참기만 했는데, 이제는 욕망을 단순히 참기보단 아예 다스리고 싶습니다. 예를 들어 나체의 여성이 저를 유혹하려고 다가오면 지금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은데, 그걸 참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질문자는 올해 몇 살이에요?”

 

“29살입니다.” 

 


“29살이나 되는 젊은 사람이라면 여성을 봤을 때 욕망이 일어나는 건 신체구조상 정상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질문자의 얘기를 들어보니, 질문자는 보통 사람보다는 성적 욕망이 약간 더 강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어떤 시대에는 성적 욕망이 강한 걸 ‘남성적’이라며 좋게 보는 경우도 있었어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게 있기 마련이예요. 예를 들어 ‘공부하기 싫다’, ‘뭐가 먹고 싶다’, ‘누가 좋다’ 이렇게 누구나 뭐든지 하고 싶은 게 있는데, 이 세상에서는 하고 싶다고 다 할 수가 없어요.”  

 

“저는 하고 싶다는 마음조차도 안 일어나게 할 수 있는지가 궁금합니다.” 

 

“그럼 화학적 거세를 해야지요.” (모두 웃음)  


 

“제가 사랑하는 한 여자를 위해서는 하는데, 다른 여자에 대해서는 안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요.”

 

“윤리와 수행 두 가지 측면에서 얘기할 수 있는데, 이 윤리와 수행은 좀 다릅니다. 첫째, 윤리적 측면에서 볼 때, 질문자가 어떤 여성에 대한 성적이 욕망이 있다는 것 자체는 나쁘다 좋다고 말할 수가 없어요. 현실이니까요. 마찬가지로, 좋은 자전거를 보고 ‘저거 갖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건 나쁘다 좋다고 말할 수가 없지요. 그 자체는 욕심이 일어나는 현실이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남의 물건을 갖고 싶다고 다 갖게 되면, 그건 내 입장에서는 괜찮지만 상대 입장에서는 괜찮지가 않잖아요. 또 내가 상대가 좋다고 껴안는 건 내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지만 상대 입장에서는 고통스런 일이잖아요. 그래서 나에게 이롭다고 상대에게 손해를 끼치거나 내가 즐겁자고 상대에게 고통을 준다면, 공동체 안에서는 반드시 그에 대한 과보가 따릅니다. 예를 들어 상대도 내 물건을 훔쳐갈 수도 있고, 나는 싫은데 상대가 자기 멋대로 나를 괴롭힐 수도 있는 거예요. 이런 문제 때문에 내가 이익을 추구할 권리는 있지만 상대에게 손해를 끼칠 권리는 없으므로 욕망이 있지만 멈춰야 된다는 겁니다. 내가 즐거울 권리는 있지만 또한 상대를 괴롭힐 권리는 없기 때문에 그 전에 멈춰야 됩니다. 거기까지가 한계라는 겁니다. 

 

이걸 윤리라고 해요. ‘인간의 욕망은 나쁘다’ 라고 가르치는 게 윤리가 아니고, 인간은 욕망을 가진 존재인데 그 욕망이 타인에게 해를 끼치기 전 단계에서 멈춰야 한다는 게 윤리입니다. 멈추지 않으면 반복적으로 서로에게 보복을 하게 되니까요. 그런데 멈추지 않으면, 즉 윤리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어떤 문제가 발생합니까? 윤리적인 비난과 법률적인 처벌을 받게 됩니다. 예를 들어 질문자가 ‘저 여학생의 종아리를 만지고 싶다’고 해서 종아리를 만졌다면 상대에게 고통을 준 거잖아요? 그래서 상대가 질문자로부터 성추행 당했다고 고소하면 질문자는 처벌을 받게 돼있단 말이에요. 질문자가 그 종아리를 만지고 싶은 걸 못 참아서 한 번 만지고 6개월 감옥에 간다고 가정했을 때 질문자가 ‘6개월, 뭐... 한 번 만져봤으니까 됐다’ 라고 생각한다면 괜찮아요.(모두 웃음) 


 

그런데 질문자가 순간적으로 욕망을 못 참아서 6개월간 감옥살이를 하는 것이 ‘짧은 쾌락에 비해서 불이익이 너무 크다’ 싶으면 다음에는 만지고 싶더라도 자제를 해야 된다는 거예요. 상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질문자 자신을 위해서요. 하고 싶지만 실제로 하면 질문자에게 손해이니까 자제를 해야 되고, 반대로 하기 싫다고 실제로 안 하면 질문자에게 손해가 나는 일이 있다면 그 일은 또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들 대부분은 자꾸 ‘하고 싶은 걸 왜 못 하게 하느냐?’, ‘하기 싫은 걸 왜 하라고 그러느냐?’ 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하기 싫은 걸 어르신들이 하라고 하는 이유는 하는 게 여러분에게 이로우니까 그러는 것이고, 하고 싶은 걸 못하게 하는 이유는 그걸 하게 되면 여러분들한테 손해이니까 하지 말라는 것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몰래 하고서 손해가 금방 드러나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해도 괜찮네, 뭐’ 하면서 두 세번 더 하다가 발각되면 그 때 후회를 하지요. 그래서 첫째, 하지 마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윤리입니다. 그리고 그 윤리를 넘어서면 법률에 의거해서 처벌을 받게 되는 겁니다.

 

둘째, 수행의 측면에서 보면 이렇습니다. 수행은 그런 불이익이 돌아오고, 안 돌아오는 것과 관련된 윤리를 훨씬 넘어서는 문제입니다. ‘잠시의 쾌락이 결국 나에게 고통을 가져온다’, ‘쾌락의 과보가 고통이다’ 하는 관점입니다. 그러니 고통을 받지 않으려면 쾌락을 내려놓아야 되는 거예요. 보복의 개념이 아니라 원인 제거의 개념이에요. 욕망 자체를 부정하면서 ‘욕망을 갖는 건 다 죄다’는 개념은 종교적 관점이고, 그 욕망에 휘둘리지 말라는 게 수행적 관점이에요. 질문자가 욕망을 너무 참으면 나중에 터진단 말이에요. 그래서 성폭행이 일어날 수도 있어요.” 

 

“상대가 원하지 않으면 저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약 상대가 질문자에게 같이 놀자고 한다면 질문자가 같이 놀아도 돼요.” 

 

“그런데 저는 그러기 싫어요. 왜냐하면, 저에게 나중에 여자 친구나 아내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저에게 아내가 있는데도 나중에 다른 여자가 저랑 놀자고 하면 어떻게 해요?”

 

“상대가 원하지 않는데도 질문자가 상대와 관계를 맺으면 그건 범죄가 되겠지만 질문자에게 부인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어떤 여자가 같이 놀자고 해서 놀면 그건 범죄에 속하는 게 아니고 질문자의 선택에 속합니다. 그런데 질문자가 그 여자와 연애를 한다면 질문자는 부인으로부터 이혼을 당하는 과보를 받게 되겠지요.” (모두 웃음) 

 

“과보가 두렵긴 한데요.”  

 

“질문자는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지요. 여자 종아리를 만지고 감옥에 갈 거냐, 안 만지고 감옥에 안 갈 거냐 하는 문제와 마찬가지로, 그 여자와 하루 놀고 자녀가 있는 부인과 이혼을 할 건지 여부는 질문자가 선택해야지요. ‘작은 즐거움이 큰 손실을 가져오는구나’ 싶으면 자제를 해야 되고요.”

 

“그런데 예를 들어 정말 예쁘고 섹시한 여자가 제 옆을 지나가고 있을 때 어떻게 하면 제가 눈길을 안 줄 수가 있을까요?” (모두 웃음)

 

“그냥 쳐다보면 되지요, 뭐.” (모두 웃음)


 

“부처님께서는 안 쳐다보셨을 거잖아요.”

 

“자기는 부처님이 아니잖아요.” 

 

“저는 참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데, 수행 방법을 좀 알려주세요.”

 

“좋아요. 그런데 질문자는 욕심이 너무 많아요. 기대가 너무 높으면 현실에서 오히려 실현이 잘 안 됩니다. 질문자는 바로 부처님 흉내를 내려고 하면 안 돼요.(모두 웃음) 질문자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첫 번째로, ‘내 이익을 위해서 상대에게 손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 내 즐거움을 위해서 상대에게 고통을 줘서는 안 된다’ 하는 겁니다. 질문자는 이 계율을 지켜야 해요. 이걸 어기는 건 범죄에 속하는 거예요. 두 번째는 ‘작은 이익을 위해서 큰 손실을 봐서는 안 된다’ 하는 겁니다. 이것은 지혜에 속합니다. 이것을 지킬 줄 모르는 건 어리석음에 속해요. 

 

그러니 첫 번째 것을 어기는 건 범죄에 속하기 때문에 처벌을 받아야 되고, 두 번째 것을 어기는 건 범죄는 아니지만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10원 벌려고 100원 손해 보는 것과 같습니다. 여자 종아리 한 번 만지고 6개월 감옥살이 하는 건 바보 같은 짓에 속하잖아요? 그런 것처럼 여자가 아무리 아름답더라도 그 여자와 데이트하고 나서 자녀까지 낳고 살아온 부인과 헤어진다면 그것은 질문자에게 큰 손실입니다. 그러니 질문자가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욕망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어, 이건 나한테 손실이야’ 하고 알아차려서 그런 손실 볼 일을 안 해야겠지요. 예를 들어 여기 엄청나게 색깔도 좋고, 냄새도 좋고, 맛있는 음식이 있어서 질문자가 먹으려는데 누가 ‘거기 쥐약 들었다’라고 하면 그것을 먹어야 되나요? 안 먹어야 되나요?”   

 

“참아야 돼요.” 

 

“참기는... 쥐약 들었다는 음식을 안 먹으려고 계속 참는 사람이 어딨어요? 질문자라면 그 음식 옆에서 그 음식을 보면서 계속 참겠어요? (모두 웃음) ‘거기 쥐약 들었다’고 하면 거기서 딱 그만이지요. 그런데 그때 자꾸 ‘조금만 먹어보면 안 될까요?’ 하는 사람이 있다면 부처님은 그래도 ‘거기 쥐약 들었다’고 하실 텐데, 법륜 스님은 인내심이 부족해서 그렇게 세 번만 물으면 ‘그래, 먹고 죽어라!’ 라고 합니다.(모두 웃음) 


 

그러니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그 과보를 받으면 돼요. 즉 결혼을 했어도 다른 여자를 만나고 싶으면 만나다가 이혼을 하면 되는 거예요. 인연과보이니까요. 질문자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져야 된다는 거예요. 질문자는 그 여성과 데이트할 자유가 있어요. 그건 강제가 아니니까 범죄도 아니기 때문에요. 그러나 질문자의 부인에게도 질문자와 이혼할 권리가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질문자는 그걸 받아들여야지 ‘내가 잠깐 실수했다고 너무 과하지 않느냐?’ 라고 말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과보를 안 받으려면, 즉 돈을 안 갚으려면 돈을 안 빌려야 된다는 거예요. 빌렸으면 갚아야 되고, 갚기 싫으면 안 빌리는 길 외에 다른 길은 없어요. 윤리는 질문자의 행위에 대해 나쁘다 좋다고 평가하지만, 불교는 그렇게 평가하지 않는 대신 ‘질문자가 지혜롭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고, 질문자가 어리석다면 그렇게 해서 스스로 손실을 본다’ 라고 말하는 겁니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질문자가 부처님을 닮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질문자는 나체 사진을 앞에 두고 따악 앉아서 자기에게 일어나는 성적인 욕망을 지켜봐야 합니다. 외면하지 말고, 응시하면서 성적인 욕망을 지켜보라는 거예요. 어떤 여성과 관계를 갖거나 자위 행위로 해결하지 말고, 그냥 계속 지켜보세요. 담배를 피우고 싶은 욕망이나 성적인 욕망이나 욕망은 다 같습니다. 그런데 그 욕망이 계속 지속될까요? 아니면 가만 놔두어도 어느 정도 가다가 가라앉을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가라앉아요.” 

 

“예. 담배가 피우고 싶을 때 담배를 피우면 욕망이 내려가듯이 성적 욕망이 있을 때 관계를 맺으면 일단 해소가 되겠지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또 욕망이 일어나잖아요. 그런데 그걸 해소를 안 하고 그냥 놔두면 견디지 못할 만큼 올라갑니다. 그래도 내버려두면 어떻게 될까요? 다시 내려갑니다. 영원히 지속되는 욕망이란 없습니다. 그걸 질문자가 경험을 해 봐야 합니다. 질문자가 계속 지켜보면, 일정한 시간이 되면 욕망이 가라앉습니다. 그렇게 저절로 가라앉는 경험을 질문자가 한 번 하고, 두 번 하고, 세 번 하는 식으로 자꾸 경험해 보세요. 그 첫 번째가 어려운 거예요. 그런데 자꾸 해 보면, 욕망이 첫 번째로 일어났을 때 100까지 치솟았다가 내려갔다면, 두 번째는 98에 내려가고, 세 번째는 97에 내려가고, 네 번째는 95에 내려갈 것입니다. 올라가긴 올라가지만 내려가는 꼭지점이 갈수록 낮아집니다. 욕망은 지속적으로 생겨나지만 욕망을 견뎌내는 힘은 자꾸 커집니다. 

 

참으려고 하면 이를 악다물고 견뎌야 하고, 그냥 가만히 지켜보면 어느 시점에서 내려가고, 또 내려갑니다. 처음에는 1시간 있다가 내려갔다면 다음에는 55분, 다음에는 50분, 다음에는 30분, 이런 식으로 내려갈 겁니다. 그렇게 되면 만약 질문자가 어떤 여자와 호텔에 가서 발가벗고 침대까지 들어갔을 때 여자가 ‘난 싫어’라고 하면 ‘알았다’하고 나올 수 있을 겁니다. 그 때 ‘아니, 누가 오자고 했는데?’라고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어떤 경우에도 상대의 의사에 반하면 성추행이 됩니다. 


 

엄격하게는 부부 지간에도 상대가 원하지 않으면 성추행이에요. 옛날엔 부부 지간이라면 상대가 원할 때 응하는 게 의무처럼 되어있었기 때문에 신고가 들어와서 경찰이 현장에 출동해서 부부가 싸우는 걸 확인했어도 ‘우리는 부부입니다’ 하면 아무런 조치없이 돌아갔지만, 지금은 부부라고 해도 상대를 때리면 폭행죄에 들어가고, 상대가 원하지 않는 관계를 맺으면 성추행죄에 들어갑니다. 

 

욕망은 다 채워야만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채워도 다시 일어나고, 그냥 놔둬도 가라앉고 그러는 게 욕망이에요. 그러니 질문자는 제가 말씀드린 대로 알아차리기 연습을 한번 보세요.” 

 

“연습하겠습니다.” (모두 박수) 

 

“욕망을 해소해서 문제를 풀면 욕망은 점점 강화됩니다. 그러니 욕망을 그냥 놔두고 가라앉게 하는 연습을 자꾸 해야 돼요. 여성들이 사고 싶은 물건을 사서 해소하는 것도 흡연과 똑같습니다. 백화점에 가서 물건을 사고 싶을 때 백화점에 안 가는 방법도 있지만 그건 수행은 아닙니다. 수행을 제대로 하려면 백화점에 가서 물건들을 보면서도 안 사야 됩니다. 쭉 보면서도 억지로 참고 안 사면 다음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는데,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어보세요. 계산하려고 손이 주머니로 갈 때도 계속 보고 있어보세요. 그 욕망이 가라앉을 때까지요. 이것이 수행입니다. (모두 웃음) 


 

수행은 참는 게 아니에요. 욕구의 원리를 알아서 거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수행입니다. 바깥 사물로부터, 즉 내 차 앞에서 중앙선을 침범하며 운전하는 사람으로부터도 내가 자유로워지고, 상사가 잔소리 하는 것으로부터도 자유로워져야 되지만, 자기 욕망으로부터도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그런데 제일 어려운 것이 자기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겁니다. 그래서 백만 대군을 이기는 것보다 스스로를 이기는 사람이 진짜 영웅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자기 욕망으로부터 자기가 자유로워지는 게 해탈이에요. 욕망이라는 것은 까르마로부터 일어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자기 까르마로부터 해방되면 그게 바로 해탈입니다.” 

 

질문자는 스님이 이야기한 대로 연습해보겠다며 우렁차게 대답했습니다. 큰 박수가 쏟아지면서 강연장의 분위기가 한층 더 밝아졌습니다.  

 

이 외에도 6명이 더 스님에게 질문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답변을 모두 마치니 어느덧 강연을 시작한지 2시간 30분이 지났습니다. 질문을 더 하고 싶어하는 청년들이 많았지만 여기까지만 하고 마지막으로 스님이 정리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에게 욕망이 있다는 건 현실입니다. 이걸 부도덕하게 생각하면 안돼요. 종교의 문제점은 욕망을 자꾸 부도덕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거예요. 그렇다고 욕망을 따라가는 건 우리에게 손실입니다. 그러니 욕망이라는 현실은 인정하되, 욕망을 따라가면 본인에게 손실이고, 그걸 참기만 하면 스트레스가 되고, 그게 폭발하면 더 큰 화를 자초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어떻게 하는 것이 본인에게 이익인지를 따져보라는 겁니다. 

 

제일 좋은 건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거예요. 욕망이라고 다 나쁜 게 아니거든요. 예를 들어, 결혼한 부부가 성적 욕망을 자제한다며 한 사람은 침대에 누워있는데, 한 사람은 앉아서 명상이나 한다면 안 되겠지요?

 

4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욕망대로 해도 되는 경우가 있고, 안 해야 되는 경우가 있고, 하기 싫은데 안 해도 되는 경우가 있고, 하기 싫어도 해야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객관적인 조건은 ‘할 수 있고, 할 수 없고’이고, 주관적인 욕망은 ‘하고 싶고, 하기 싫고’ 입니다. 이 4가지 경우 중에 2가지는 문제 자체가 안 됩니다. 즉 ‘하고 싶은데 해도 될 조건’, ‘하기 싫은데 안 해도 될 조건’은 문제가 안 돼요. 그런데 그 욕구를 따르면 손해가 나는 경우가 있고, 하기 싫다고 안 하면 손해가 나는 경우가 있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스스로 자기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져야 됩니다. 욕구의 노예가 되면 자기한테 손해가 생기니까요. 어리석은 자는 손실을 따라갈 것이고, 지혜로운 자는 손실을 미연에 방지하겠지요. 

 

사회적으로는 윤리와 도덕의 잣대를 들이대서 나쁘다 좋다로 구분하겠지만 수행에서는 그런 게 중요하지 않고 지혜롭냐 어리석냐로 구분할 뿐이에요. 즉 ‘손실을 가져올 어리석음을 범할 것이냐? 이익이 될 지혜로운 길을 선택할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니 지금 여러분들에게 고통이 따르는 건 여러분들이 어리석어서 그런 거예요. 여러분들은 자기 성질대로 안 된다고 화를 내면서 자꾸 불행을 자초하잖아요.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나 얼마나 자기를 행복하게 만들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행복하고 싶다고 행복해지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나 행복은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가능한 거예요. 제 말 이해하셨어요?”

 

“예.”

 

“마찬가지로 자유롭고 싶다는 것도 욕망이에요. ‘행복하고 싶다’, ‘자유롭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한 여러분들은 절대 행복해지거나 자유로울 수가 없는 거예요. 이런 원리를 아셔서 여러분들의 인생이 좀 더 행복해지고, 자유로워지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모두 박수)


 

행복하고 싶다고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행복은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가능한 것이라는 말씀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습니다. 열정적으로 강연을 해준 스님에게 청년들은 뜨거운 박수갈채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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