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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100회 강연

[법륜스님 세계100강 제61강] 앤아버 "극락세계가 진짜 있나요?"

안녕하세요. 전 세계 100여개 도시에서 만난 사람들이 묻는 인생에 관한 질문과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 오늘도 시작해 봅니다. 


세계 100회 강연 중 61번째 강연이 미시간주 앤아버(Ann Arbor)에서 열렸습니다. 


오늘 강연이 열리는 앤아버(Ann Arbor)는 미국 중서부 미시간주에 있는 도시로서 디트로이트에서 서쪽으로 약 60km 지점에 위치하며 미국의 명문 주립대학중의 하나인 미시간대학교(University of Michigan Ann Arbor)가 1837년에 들어오면서 대학도시로 발전하게 되었고, 좋은 환경과 우수한 교육시설들로 인해 미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한편 앤아버의 인구는 114,000명(2010년 센서스)이며, 이중 교민은 700여명의 한국학생(유학생 포함)을 포함하여 약 3,000명 정도이고, 그 밖의 미시간주에도 약 2,300명의 교민이 거주하고 있다고 합니다. 



▲ 미시간대학교 캠퍼스


스님은 어제도 밤을 새우다시피 하며 새책 원고 교정을 했는데, 오늘도 오전 4시에 기상하니 스님 숙소에는 벌써 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오전 6시에 아침식사를 하고 짐을 꾸려서 7시에 앤아버로 출발하였습니다. 숙소에서 미시간대학교까지는 5시간 거리인데 시차가 한 시간 있는지라 실제로는 6시간 걸리는 것이 됩니다. 


오늘부터 켄사스시티 일정까지는 스텝들이 모두 한 차를 타고 이동하기로 하여 8인승 밴에 7명이 타고 차 지붕에 달린 카루프 박스에 짐의 일부를 싣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짐반 사람반으로 차안이 가득 차고 스님도 움직일 공간이 거의 없게 되었습니다. 



▲ 짐반 사람반인 차량 안.


6시 50분에 시카고를 출발하여 앤아버로 이동을 하였는데 새벽녘 떠오르는 일출이 아주 장관이었습니다. 



한참을 달려서 앤아버로 진입하니 Exit 근처에 가까운 공원이 있어서 아침에 준비해간 군고구마로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 잠시 공원에 앉아 군고구마로 점심식사. 


어제 시카고 날씨와는 달리 바람이 차고 쌀쌀한 날씨였습니다.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1시에 학교에 도착했는데 캠퍼스가 참 아름답고 단풍과 학교가 아름답게 어우러져 있었습니다. 스님은 대기실에서 기다리시는 동안에도 새책 원고교정을 계속 보았습니다. 



▲ 오늘 강연장, Rackham 빌딩


오늘 앤아버 강연에는 총 240명이 참석했는데 미시간대학교 학생들과 디트로이트 인근 도시에서 온 교민들도 많았습니다. 소개 영상이 끝나고 오후 3시가 되자 바로 강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은 총 6명이 스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그 중에서 제사 지내는 것에 대해 많은 질문들을 쏟아낸 한 할머님의 질문과 스님의 답변이 많은 재미와 유익함을 주었기에 그 내용을 자세히 소개합니다. 계속된 스님과의 문답 속에서 청중들은 빵빵 웃음을 터뜨리며 그 속에서 깊은 교훈도 얻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 질문자 : “안녕하세요, 스님. 제가 묻고 싶은 질문은 극락세계가 진짜로 있는 것인지 입니다. 저희가 조상님들을 위해서 해마다 백중을 지내잖아요. 친정엄마가 돌아가신 지 20년이 되었습니다. 돌아가시고 나서 3~4년은 49재를 지극정성으로 지냈는데 계속 백중을 지내면 극락으로 가실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제사를 오빠가 한국에서 지내다가 미국에 있는 종손에게 주었는데 종손은 기독교인이예요. 그래서 조카에게 기제사를 지내냐고 솔직하게 말해달라고 전화해서 물어보니까 딱 잘라서 안 지낸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 할머니를 절에라도 모시게 해야 제사라도 지낼 수 있지 않느냐‘고 했더니 절에서 지내고 비용 등을 알려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딸들도 제사를 모실 수 있는지, 그리고 귀신이 있는지, 교황님도 오셔서 귀신이 있다고 하시는 걸 뉴스에서 봤거든요. 그리고 극락세계가 있는지, 오래 계신 조상님들도 계속 천도를 해주시면 그게 되는지, 돌아가신 조상님이 미국에서 제사를 지낸다면 미국까지 오시는지(청중들 웃음) 궁금합니다. 그리고 티제이맥스에 가면(청중들 웃음) 부처님을 파는 게 있거든요, 12,000원에요. 그러면 저는 되게 기분이 나쁘거든요. 제가 관세음보살님을 사서 집으로 모셔도 되는 건지, 아침에 기도드릴 때 물을 떠놓고 지내야 되는지, 아니면 그냥 기도를 드려도 되는 건지 궁금합니다.”


“한 마디로 말씀 드리면, 할머니 좋을 대로 하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저는 원래 저 좋을 대로 하고 지내는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조상님이 분명히 제삿밥을 드시러 오신다는 확인이 되어야... 아무리 딸이지만, 제가 딸네 집에 같이 있는데, 딸도 불교를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같이 제사를 지낼 수도 있고요.”


“기독교 신자는 하나님이 있다고 믿어요? 없다고 믿어요?”


“있다고 믿어요”



“그런데, 질문자는 불교신자인데 하나님이 있다고 믿어요? 없다고 믿어요?”


“기독교라도 지극 정성으로 믿으면 신의 축복은 받을 수 있다고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도 조상님을 지극 정성으로 믿으면 축복을 받지요.”


“저는 지극정성으로 하는데 의문스러워서 큰스님에게…”


“아니, 그러니까 기독교 신자들이 하나님을 지극정성으로 믿을 때, ‘저렇게 지극정성으로 믿으면 신의 은총이 있겠다’ 생각하잖아요? 그럴 때 그 분에게 물어보면 그 분은 신이 있다고 믿을까요? 없다고 믿을까요?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할까요?”


“제가 물어봤는데 대답을 안 하더라고요. (청중들 웃음) 그런데 저는 부처님에게 지극정성으로 기도했을 때 가피를 크게 한 세 번 네 번씩 받은 것을 확실히 느낍니다.”


“질문자는 부처님께 기도하고 가피를 받았기 때문에 부처님이 가피를 주신다고 믿는데, 믿는 건 이해가 된다 이 말이예요. 그런데 그것을 기독교인들이 볼 때는 ‘진짜 부처님이 가피를 줄까’ 하는 의문이 들까요? 안 들까요?”


“들겠죠”


“그래요. 그러니까 믿는 사람은 있다고 생각하니까 믿는 거 아니겠어요? 그와 달리 못 믿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니까 안 믿는 거 아니겠어요? 그런 생각의 차이 밖에 없어요. 한 사람은 있다고 믿고, 한 사람은 없다고 믿고요. 그러니 어느 것이 옳은가는 없고 두 사람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즉, 한 사람은 미국에서 살고 한 사람은 한국에서 사는데 어느 사람이 더 훌륭하냐고 물으면 어떻다고 말할 수 없고 두 사람이 사는 곳이 서로 다르다는 것만 얘기할 수 있어요.”


“아니요, 그런 것을 떠나서, 스님이 보시기에 귀신이 진짜로 있는지, 조상님들이 진짜 제삿밥을 드시러 오시는지 그게 제가 의문스러운 점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있고, 없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없다는 것입니다.”


“…(잠시 침묵 후 청중들 웃음) 그러면 백중은 해마다 계속 지내는 게 좋겠네요?“


“좋겠다고 생각하고 지내면 좋고, 지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 안 지내도 되고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자들은 백중을 안 지내도 다 살잖아요. 그렇죠? 그러니까 백중 안 지내도 사는 데에 지장이 없고, 불교 신자들은 지내는데 지낸다고 벌 받는 것도 없고요. 본인이 지내는 것이 좋다고 믿는다면 지내면 좋은 거죠. “


“그러면 스님들은 앞날도 보시고 귀신도 보시고 그러신다던데 그게 맞습니까?”


“그러니까 귀신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보이고, 귀신에 대해서 별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는 안보이고 그런 겁니다.” (청중들 웃음) 



“아니요, 제 질문은 큰 스님 눈에도 제사를 지내실 때 귀신들이 오는 것이 보이시냐는 말입니다.”


“저는 그런 게 있다 없다 하는 생각을 별로 안 해요.”


“아, 49재를 하던지 백중을 할 때 스님들이 가마를 해서 절 문으로 영혼을 모시러 나가거든요. 그 때 들고 나갔다가 와서 법당 안에서 영혼들을 부르잖아요. 그럴 때 저도 죽은 큰 오빠와 셋째 오빠가 와서 고마워한다는 느낌을 받거든요”


“네, 느낌은 얼마든지 받을 수 있죠. 나도 지금 저 여자 분을 보니까 저 여자 분이 분명히 저를 좋아하는 것 같이 느껴지는데... (청중들 웃음) 느끼는 건 자유예요. 그렇다고 저 여자 분이 나를 좋아한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요. 그러니까 본인이 있다고 느꼈으니까 느낀 사람에게는 있는 거예요. 못 느낀 사람에게는 없는 거고요. 예를 들어, 저와 질문자가 밤에 길을 가다가 제가 “어, 저기 귀신 봐라!” 했는데 질문자가 “스님, 귀신이 어디에 있어요?”, “여기에 있잖아, 여기”, “스님, 아무 것도 없는데 헛것을 본 것 아니에요?”, “아이고, 눈이 삐었나? 여기 있잖아. 여기!” 하면 누구 말이 맞아요?”


“그러니까 스님 말씀은 ‘자기가 생각하기 나름이다’ 이 말씀이시죠?”


“두 사람 중에 누구 말이 맞습니까? 두 사람 중에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스님이 동문서답 하시는 것 같아요.” (청중들 웃음) 


“동문서답 하는 것 맞아요. 그런데 누가 동문서답 하는지 모르겠네요.” (청중들 웃음) 


“확실한 답을 안 주시잖아요. 예, 알겠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느꼈습니다.”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아직 잘 못 느낀 것 같은데요. 해결이 안되었으면 계속 물어보세요.”


“스님 말씀이 자기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 아닙니까? 마음에 느끼는 대로 생각을 하라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하고 싶으면 하고, 하고 싶지 않으면 말라는 거잖아요.”


“부처님이 ‘귀신이 있다’ 이렇게 경전에 써놓았을까요? 경전에는 있다고도 없다고도 안 씌여 있습니다. 그 대신 ‘일체가 유심조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 세상의 모든 일은 인간의 마음이 짓는다는 뜻이지요.”


“그런데요, 제가 법문 들을 때에는 큰스님께서 귀신을 보셨다고 하던데요.”


“큰스님께서 보셨다고 하면 ‘큰스님 눈에는 귀신이 보이는구나’ 하시면 됩니다. 만약 우리 둘만 알고 다른 사람한테는 절대 모르게 해서 우리 둘이 만나서 뭐 하자고 약속을 했다고 합시다. 그래서 그 장소에 가니까 제 3자가 떡하니 나타나 있는 거예요. 그 때 어떻게 알고 나타났다고 하죠? ‘귀신같이 알고 왔네’ 하죠? 도저히 알 수 없는 사람이 알 때 귀신같이 안다고 하잖아요. 그 말은 귀신은 뭐든지 안다는 말이잖아요? 그러니까 귀신은 전지한 거예요. 그렇다면 뭐든지 아는데 제삿날을 하루 쯤 옮기면 귀신이 그걸 알까요? 모를까요?”


"알겠죠”


"장소를 좀 옮기면 알까요? 모를까요? 


"알겠죠”


"한국인지 미국인지 큰 집인지 작은집인지 모르면 귀신이 아니죠. 귀신은 뭐든지 알아야 귀신이기 때문에 제사를 옮기는 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산소를 옮기는 것도, 집을 옮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민할 일이 아니에요. 이렇게 생각하면 제사를 큰집에서 지내도 문제가 없고, 작은 집에서 지내도 문제가 없고, 날짜를 옮겨도 문제가 없고, 아들네 집에서 지내든지 딸네 집에서 지내든지 귀신한테는 아무 문제가 없어요. 문제는 살아있는 사람들한테 문제가 있어요. 살아있는 사람들의 관습에 문제가 있는 거예요. ‘제사는 장자가 지내야 되는데, 차자가 지내도 되나?’, ‘아들이 아니라 딸이 지내도 되나?’ 하는 건 살아있는 사람들의 생각이지 귀신 생각이 아니에요. ‘절에 있다가 교회에 가도 되나?’ 하는 것도 사람들의 문화에 대한 차이에서 오는 것이지 귀신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어요. 그래서 조상 제사를 가지고 싸우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생각 차이 때문에 싸우는 것이지 귀신하고는 무관한 것입니다. 사람들끼리 합의를 봐서 이렇게 하든지 저렇게 하든지 합의만 보면 귀신은 아무런 상관을 하지 않아요.


부처님 오신 날은 부처님의 생일 아닙니까? 그때 부처님이 태어난 인도의 어느 장소 딱 한군데서만 생일상을 차려요? 전세계 절마다 다 초파일 행사를 해요?”


“예, 전 세계에서 다 하죠”


“크리스마스도요?”


“크리스마스도 전 세계에서 다 하죠”


“그러면 제사도 집집마다 지내도 될까요? 안 될까요?”


“그건 모르겠습니다.” (청중들 웃음)


“굉장하신 분입니다.”

 


“여러 집에서 지내면 귀신 마음대로 가겠죠.”


“그런데 부처님이나 예수님은 절이나 교회가 이 세상에 수십만 개가 있는데 그곳을 어떻게 다 갈까요? 그래도 다 가잖아요. 그렇죠? 그래도 귀신은 그만큼은 안 가도 되잖아요. 아들 딸이 많아야 5~6명이니까 가봐야 다섯 군데, 여섯 군데잖아요. 그러니까 큰집에서 지내는데 같이 가서 지내도 되고, 작은 집은 따로 지내도 되고, 큰 집은 교회에서, 작은 집은 절에서 지내도 아무 문제가 없어요.”


“잘 알겠습니다. (청중들 박수) 그런데, 부처님을 집에서 모셔도 됩니까?”


“좋을 대로 하세요. 집에다 모셔도 되고, 안 모셔도 되고요. ‘부처님을 집에 모셨다’ 고 하는데, 그건 부처님이 아니에요. 불상이지요. 돌로 깎고 플라스틱으로 만든 상이잖아요. 그렇죠? 불상은 정원에다 모셔도 되고, 법당에다 모셔도 됩니다. 예술작품으로 대해도 되고, 신앙의 대상으로 모셔도 됩니다. 절에 가면 불상이 많잖아요. 그런데 불상을 부처님처럼 생각하고 모시면 비록 나무이든지 돌이든지 상관없이 나한테는 부처님 역할을 하는 것이고, 그것을 예술작품으로 보는 사람에게는 그것은 부처님이 아니고 하나의 조각입니다. 그러니까 집에서 불상을 부처님처럼 모시면 그 앞에서 내 마음이 경건해지는 것이고, 조각으로 모시면 그냥 집안의 장식품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파는 걸 사와도 되고요. 


그런데 부처님으로 모시려면 절에서는 점안의식이 있어요. 불상이 부처는 아니기 때문에 부처로 모실 때에는 ‘제가 앞으로 부처님으로 인정하고 모시겠습니다’ 라는 의식을 해야 돼요. 그것을 점안이라고 합니다. 절에서는 그런 전통 문화를 갖고 있어요. 스님들은 그런 전통 문화를 따르지 않으면 그 안에서 왕따를 당하니까 따라야 하지만, 신자들은 집에서 불상을 모실 때 점안을 했는지 안했는지 다른 사람들이 상관을 안 합니다. 그러니까 질문자가 오늘 찬물 한 그릇 떠놓고 삼배하고 ‘오늘부터 내가 당신을 부처님으로 모시겠소’ 한다고 해도 교리에 어긋나는 것이 아닙니다. 천하만물이 본래 다 부처이기 때문이지요. 일체 유심조, 다 마음이 짓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어때요? 이제 좀 자유로워지셨습니까?”


“예, 자유로워졌습니다. 멀리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스님께 합장반배로 인사하며 활짝 웃는 할머니를 보며 청중들도 큰 박수를 보내줍니다. 즉문즉설이 이런 것이구나 가슴에 와닿는 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