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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100회 강연

[법륜스님 세계100강 제34강] 캐나다런던 "기독교의 적극적인 전도, 어떻게 생각하세요?"

안녕하세요. 전 세계 100여개 도시에서 만난 사람들이 묻는 인생에 관한 질문과 법륜 스님의 답변! 오늘도 시작해 봅니다.  


법륜 스님의 세계 100회 강연 중 34번째 강연이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런던에서 열렸습니다. 스님은 북미주에 도착한 이래로 건강을 회복하고 강연에 집중하기 위해 계속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오전에는 충분히 휴식을 취한 다음 오후에 강연장으로 이동했습니다. 




캐나다 런던은 인구가 약 43만명인 비교적 작은 도시이나 인근에 유명한 워털루 대학이 있고, 미국 국경과 가까워서 그런지 한인들이 오타와 보다 많은 약 4천명 정도가 거주한다고 합니다. 어제 묵은 숙소에서 런던 행사장까지 약 2시간 정도 걸려서 도착하였습니다. 런던으로 가는 길이 가을 걷이를 끝내고 있는 한국의 어느 농촌 마을 같은 풍경이 펼쳐져 마음이 평화로워졌습니다

오늘 캐나다의 런던 강연장은 조그만 호텔 (Ramada Inn)의 Conference Room을 예약하여 장소가 마련되었습니다. “캐나다 런던에서 이런 행사가 열린 것 자체가 처음있는 일”이라며 강연장에서 총괄하는 책임자는 “한 50명정도 오지 않겠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강연이 시작하자 계속 사람들의 입장이 이어져서 의자를 계속 셋팅하고도 의자가 모자라 바닥에도 앉게 되어 최종적으로 약 160명의 사람들이 참석하였습니다. 스님은 환영 영상과 소개 영상이 나오자 2시 50분에 무대위로 올라갔습니다.  




“반갑습니다. 오늘은 일요일인데도 놀러 안가시고 이곳에 오셨네요. 오전에 교회는 다녀오셨어요? 교회 다녀오신 후에 강연 오시라고 오후 3시에 강연을 마련했습니다. 이곳에 절은 없지요? 절에 다녀오신 분은 없을 것이고요. 저도 이번에 강의를 잡으면서 캐나다에 런던이 있는 줄 처음 알았습니다. 런던에서 한다고 하니 영국 런던 강연과 날짜가 얼마 떨어지지 않아서 혹시 잘못된 것은 아닌지 문의하는 전화가 많이 왔고, 영국 런던과 헷갈려 하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런던에 사는 소감이 어때요?” 


“아주 좋아요” (청중 대답) 




“오늘 제가 여러분들께 특별히 전달할 메세지가 있는 것은 아니예요.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 이런 얘기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자기 좋을대로 살면 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다만 몇가지 제한이 있는데 같이 살기 때문에 이것은 어쩔수 없는 것 같아요.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 살 방도를 마련할 수 있지만 남을 헤칠 자유는 없어요.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 이익을 추구할 권리가 있지만, 남의 이익을 침해할 권리는 없어요. 사람은 누구나 다 행복하고 사랑할 권리가 있지만 남을 괴롭힐 권리는 없어요. 사람은 누구나 다 마음껏 말할 자유가 있지만 남을 속일 자유는 없어요. 이런 정도의 한계를 제외하고는 사람은 자기 좋은대로 살면 됩니다.

 

쥐가 쥐약을 먹었을 때 쥐는 살려고 먹지만 결과적으로 죽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나쁜게 아니라 어리석은 것으로 자기가 자기를 손해끼치고, 자기가 자기를 해치고, 자기가 자기를 괴롭히고,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이런 어리석은 것은 깨우쳐야 합니다. 어린이들은 어리석기 때문에 어른들이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가끔 어른이 되었는데도 자기가 자기를 해치는 분이 의외로 많은 것 같아요. 더 행복할려고 한 행동이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면 이럴 때는 원인 규명을 해보면 좀 더 나은 결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이 제기하는 문제, 즉 그것이 개인 문제든, 사회 문제든, 종교 문제든, 과학 문제든, 인간역사 문제든, 자연환경 문제든 그것을 가지고 평소에 자기가 의문이 있거나 얘기하고 싶은 고뇌가 있으면 자유롭게 얘기해보도록 합시다. 대화방식도 제한이 없고, 주제도 제한이 없고, 그냥 대화하듯이 두서없이 얘기해도 됩니다. 자, 누구든지 시작해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3시부터 바로 질문을 받았습니다. 오늘은 총 9명이 질문을 했습니다. 그 중에서 기독교의 적극적인 전도 사상으로 인해 친구 관계에서 갈등이 생긴 기독교인의 고민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 




- 질문자 : “저는 기독교입니다. 가족들도 다 기독교입니다. 그러나 제 친구들 중에 절친한 중국 친구가 불교인데요. 제가 기독교인으로서 신앙이 부족해서 그런지 모르지만 친구들을 기독교로 전도를 못했어요. 그 대신 저는 캐나다에서 어려서부터 생활해 왔으니까 불교, 힌두교 등 다른 종교를 가진 친구들을 각자의 믿음이 있으니까 그것을 존중해줘야겠다는 마인드를 갖고 있어요. 그런데 기독교는 ‘무조건 전도해야한다’ 고 강조하니까 거기서 갈등이 생겨요. 한국 신문을 보니까 신부님, 목사님, 스님이 함께 토론회를 하던데, 불교에서는 기독교의 적극적인 전도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종교 때문에 전쟁도 나고 하잖아요.”


“종교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세속적 이익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세족적 이익을 추구하는데 종교를 이용하죠. 예를 든다면 ‘하나님을 믿으면 복 받는다’, ‘헌금 많이 하면 복 받는다’ 하는 건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하는 소리이지 예수님이 그렇게 가르치지는 않았거든요. ‘절에 와서 기도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 이것도 부처님이 한 번도 그렇게 얘기한 적이 없어요. 세속적 이익을 추구하는 건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것은 성인이 이 세상에 출현하기 전에 있었던 원시 종교의 맥락에 있는 것입니다. 종교가 갖는 배타성도 무지에 기반을 둔 원시적인 신앙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크리스트교의 핵심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 아닙니까? 구약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죠. 구약의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들으면 징벌을 하잖아요. 그러나 예수님 이후의 하나님은 징벌의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 창을 갖고 오른쪽 옆구리를 찔러 피흘리게 한 사람, 그 사람을 향해서 예수님은 어떻게 말했나요? 만약에 구약의 하나님 같으면 “주여, 저 두 놈을 지옥에 보내주세요” 이렇게 얘기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 지은 죄를 모르옵니다.” 이랬단 말입니다. 교회 안 가는 정도가 아니고 자기를 죽인 사람에 대해서도 그렇게 얘기했단 말입니다. 여기에는 이 두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온전한 이해가 있어요. 그 두 사람은 요즘 같으면 그냥 교도소의 공무원이었어요. 법원에서 사형 판결이 나면 그냥 형을 집행하는 사람이었어요. 늘 아침에 출근해서 사형 판결이 나면 그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죽으면 시신을 내리고 또 새로운 사람을 매달지요. 오늘날 도살장에 근무하는 사람, 생선가게에 근무하는 사람을 지옥에 보낸다고 하면 자기들 입장에서는 좀 억울할 것 아니겠어요. 그것은 그들의 직업이니까요. 예수님은 그들을 온전하게 이해했기 때문에, 그들이 나쁜 놈이지만 용서해주라는 것이 아니라 ‘저들은 자기 지은 죄를 모르옵니다’ 이렇게 말했단 말입니다. 이것은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성격이 이렇게 전혀 다른데 오늘날 기독교인의 대부분은 구약의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되돌아가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제가 스님이 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지옥에 보낼 수가 있겠습니까. 교회 안 오면 지옥에 간다 이런 논리 자체가 성립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유대교에서는 구원의 기준이 유대 민족이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유대 민족이면 구원을 받고 유대 민족이 아닌 이방인에게는 구원이 없다는 것이 유대교의 전통입니다. 그러니 유대교는 유대인 말고는 아무도 안 믿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유대교의 특수성을 보편화시킨 분입니다.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있습니까?” 라고 예수님께 물으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얘기를 이방인을 앞에 두고 얘기했으면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데, 유대인을 앞에 두고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있다고 얘기하니까 유대인의 전통에서 볼 때는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된 것입니다. 오늘날 어떤 목사님이 기독교인 앞에서 “이교도에게도 구원이 있다”고 얘기하면 기독교에서 쫓겨나겠죠? 그러니 당연히 예수님은 전통 종교로부터 배척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했어요. “여기 중환자가 한명 있다. 바리새 교도와 율법 학자는 지나가면서 돌보지 않았는데, 사마리아인은 그를 불쌍히 여겨 잘 돌봐주었다. 그리고 자기 갈 길이 바쁘니까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서 돌봐달라고 하고 돌아와서 또 돌봐주었다. 이럴 때 하나님이 보시기에 누가 더 좋아 보이시겠느냐?” 그러자 청중들이 다같이 “사마리아인이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얘기이고,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있다는 반증입니다. 구원의 기준이 민족과 인종에서 인류 보편적으로 변한 것입니다. 어느 민족이냐 어느 인종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 작은 자 한 사람에게 어떤 마음을 내고 어떤 행동을 했느냐가 구원의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기준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어요. 




마태복음 25장에 “최후의 심판 날 왕께서 오셔서 산 자와 죽은 자를 다 일으켜 세워서 양 때와 이리 때를 나누듯이 둘로 나누고 한편에 앉은 자들에게 ‘너희는 지옥의 불구덩이에 떨어지리라’ 하니, ‘주여, 왜 우리가 지옥에 떨어져야 하니까?’ 하니까 ‘너희들은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주여, 주가 언제 그런 적이 있었습니까’ 하니 이 세상에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구원의 기준이 아주 명백합니다. 유대인이라고 구원 받는다든지, 교회 다닌다고 구원받는다든지 이렇게 안되어 있어요.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너가 어떻게 했느냐, 이것이 구원의 기준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한다면 오늘날 제3세계에서 굶어죽는 사람들을 돕고, 병든 사람을 치료하고, 물 없는 마을에 가서 식수를 파주고, 국제 난민들을 돕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자들을 구제하는 것이 천국으로 가는 길이지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불교가 더 나으냐, 기독교가 더 나으냐, 하는 질문은 무의미합니다. 불교 신자들도 부처님과는 아무런 관계없는 것을 믿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사람이 욕심을 부리면 죽어서 돼지가 되고, 미련하면 소가 되고 이런 것은 대부분 힌두교적인 사고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불교냐 기독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각각 본래 성인의 가르침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본래 가르침으로 돌아간다는 관점만 갖는다면 서로 대화가 가능해집니다. 공통점이 굉장히 많아집니다. 


불교에서 “내 인생의 주인이 되라”는 얘기가 성경에도 다 있습니다. 성경에 “5리를 가자면 10리를 가주라. 겉옷을 달라 하면 속옥까지 내어주라.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을 대주라” 이런 말은 주어진 상황에서 주인으로 살아라는 가르침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불교적으로 보면 인연과보를 말하는 것입니다. 너가 어떤 인연을 짓느냐에 따라서 과보가 생긴다는 얘기거든요. 용어는 중요한 게 아니에요. 용어만 다르지 그 핵심 내용은 일맥상통해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불교냐 기독교냐 하는 논쟁이 아니라 진리의 길로 되돌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거기에는 불교적인 지혜도 필요하고, 기독교적인 지혜도 필요하고, 과학적인 지혜도 필요하고, 인류가 지금까지 발견한 많은 지혜들을 모아서 우리가 어떻게 더 자유롭고 행복한 세계로 나아갈 것인가가 연구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랬잖아요. 유대인들은 편협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있는 줄 알지 못했는데, 예수님은 그 편협함을 깨어버렸기 때문에 진리를 인류 보편적으로 적용하신 것입니다. 내가 교회를 다니기 전에는 불교나 힌두교를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내가 기독교 신앙을 가지면서 다른 신앙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해야 자유의 폭이 넓어진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오늘날은 멀쩡하던 사람이 불교나 기독교를 믿으면 더 폐쇄적이 되고 배타적이 된다면 그것은 원래의 가르침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질문자가 진실로 기독교 신자라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내가 실천하지 못한 것을 어떻게 실천할까?’ 여기에 삶의 초점이 맞춰져 있어야 됩니다. 그렇게 신앙을 갖고 살아갈 때 옆에 있는 친구들이 감화를 받습니다. 놀러가도 휴지를 줍고, 청소도 하고, 허드렛일은 다 하고, 그래서 감동이 되어서 ‘나도 교회에 한번 가볼까?’ 이렇게 되는 것이 전도이고 선교입니다. 제3세계의 배고픈 사람한테 가서 빵을 딱 내어놓고 기독교 믿으면 주고 안 믿으면 안 준다 하는 것은 전도가 아닙니다. 


요즘 개신교의 지나친 배타성은 국민적 저항을 불러오잖아요. 우리가 평화를 유지하려면 개신교가 각성을 하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각성은 자기 스스로 하는 것이지 옆에서 강제로 시키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저는 그런 개신교의 배타성도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배타성마저도 포용해줘야 평화가 온다는 것입니다. 남북 간에 대화를 하려면 우리는 북한의 배타성을 인정해줘야 해요. 북한의 처지를 이해하고 대화를 해야 대화가 되지 “내 한번 갔으니, 너도 한번 와라” 이렇게 하면 대화가 안 됩니다. 


그런데 저는 목사님과 북한동포돕기를 같이하면서 친해져서 매년 크리스마스 때마다 찾아가서 찬송가도 부르고, 목사님도 절에 와서 설법을 해주시고, 초파일 날에는 성당에서 성가대가 와서 노래를 불러주고 합니다. 그리고 이번 세계 100강을 할 때도 성당에서 강연하는 것이 열 번이 넘습니다. 또 강연 주선을 목사님이 많이 해주신 곳도 있습니다. 이렇게 교류를 하고 있는데, 친구를 자꾸 자기 종교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것은 올바른 자세는 아닙니다. 친구는 그냥 친구로서 지내야 합니다. 불교든 힌두교든 무슬림이든 인종이나 민족을 차별하지 말고 친구는 평등하게 대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친구 중에 자기가 행동하고 말하는 것을 보고 ‘나도 한번 교회에 가고 싶다’ 할 때는 굳이 “오지 말라”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신앙은 자기 행복이 더 우선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번에 유럽에서 강연을 할 때도 부인이 스님의 유튜브 법문을 듣고 삶의 자세가 바뀌는 것을 보고 감동을 한 외국인 남편들이 강연 준비를 많이 도와주었거든요. 유럽의 어떤 가족은 아내가 짜증을 내면 남편이 “법륜 스님 법문, 법문...” 그런다고 합니다. 이렇게 삶의 자세가 바뀌면 저절로 관심이 생겨서 찾아가게 되거든요. 신앙의 핵심은 행동입니다. 시어머니가 아무리 독실한 불교신자라고 하더라도 고집이 세고 아집이 강하면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싫어서 불교도 싫어집니다. 선교는 삶의 모범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제는 안되지만 알림은 필요합니다. 몰라서 그 길을 못갈 수 있잖아요. ‘여기 교회가 있습니다’, ‘여기 이런 공부가 있습니다’ 이렇게 알릴 뿐이지 오고 안 오고는 그 사람의 문제입니다. 숫자를 채우기 위해서 사람을 끌어 오는 방식은 상업적인 호객행위와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