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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스님 즉문즉설

성탄절, 성당에 간 법륜 스님 "하나님의 축복은 어쩌면 온갖 수난과 장애로 옵니다."

성탄절을 맞이해 쑥고개 성당에서 열린 성탄절 미사에 참석한 법륜 스님(정토회 지도법사)이  축하 인사와 더불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참뜻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성탄절인 25일, 오전 11시가 되자 드디어 성탄 축하 미사가 시작되었습니다. 2층에서는 성가대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찬송가를 부르고 있는 가운데 신부님, 스님, 교령님, 교무님이 차례대로 입장을 했습니다. 


▲ 쑥고개 성당


김홍진 신부님의 안내로 아주 거룩하게 성탄절 미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적절한 시간이 되자 신부님이 “오늘은 특별한 손님들이 찾아오셨다”며 스님, 교령님, 교무님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이웃 종교인 세 분이 나란히 십자가 앞에 서자 열렬한 환호와 박수갈채가 쏟아졌습니다. 


▲ 성탄절을 맞아 함께 자리한 이웃 종교인들.  


신부님까지 포함하면 4대 종교가 함께 어우러져 성탄을 축하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화합이 무엇인지 행동으로 보여주는 네 분의 모습은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먼저 박남수 교령님이 성탄 축하 인사를 한 후 이어서 스님이 앞으로 나와 성탄 축하 메시지와 함께 아기 예수가 이 땅에 오신 참뜻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성탄 축하드립니다. 한 사람의 삶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특히 성인들의 경우는 태어날 때와 죽을 때 가장 상징적으로 묘사되는 것 같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와 끝날 때 어떻게 했느냐를 보면 그 삶을 알 수 있습니다. 태어나실 때 어떤 모습으로 태어났으며 돌아가실 때 어떤 모습으로 돌아가셨는지를 보면 그 분의 삶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지만, 예수님께서 처음 이 땅에 오실 때는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환영받지 못해도 제 부모에게는 환영받게 마련인데 예수님은 제 부모에게도 처음에는 환영받지 못했어요. 결혼을 하지도 않았는데 아기를 가졌으니 그 어머니가 너무나 놀랐고, 결혼을 하지도 않았는데 아내 될 사람이 아기를 가졌으니 그 아버지도 매우 놀랐습니다. 그 어머니가 놀라서 거부하고, 그 아버지가 놀라서 파혼을 하려고 할 때, 천사가 나타나서 이것은 ‘하느님의 뜻이다’라고 전했는데, 두 분은 원치 않았지만 주님의 뜻이라면 세상의 어떤 비난과 어려움이 따르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신앙이 있었기에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었어요.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의 자연적, 사회적 환경도 순탄치는 않았습니다. 따뜻한 봄날이 아니라 추운 겨울날에, 게다가 밝은 낮이 아니라 어두운 밤에, 그것도 따뜻한 방이 아니라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어요. 또 로마의 지배를 받는 변방의 작은 나라에서, 그 속국의 왕이 자기 백성을 억압하는 나라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하느님의 선택된 민족’인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님의 탄생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이방인인 동방 박사들이 주님의 오심을 가장 먼저 알아본 것도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일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이 이 땅에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동박 박사들로부터 듣고 놀란 헤롯왕이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해 베들레헴 주변의 갓난 애기들을 모두 죽이는 대참극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 품에 안겨서 애굽까지 피난길에 올랐다가 간신히 돌아올 수 있었어요. 태어나실 때부터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오늘 아침에 본 뉴스가 생각납니다. 이스라엘 극우 세력들이 어린 아기를 포함한 팔레스타인 일가족을 불 질러 학살하고, 죽은 아기의 사진을 들고 아기가 죽은 것을 축하하는 파티를 열었다는 기사를 보고 증오와 미움이 사람을 얼마나 타락시키는지 알 수 있었어요. 오늘 그 뉴스를 보면서, 마치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의 상황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결코 오늘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축하 받으면서 이 땅에 오시지 않았어요. 성경 말씀대로 표현하자면 ‘가장 작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높으신 분이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셔서 가장 핍박을 받다가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돌아가셨어요. 세상 이치로 보면 실패한 인생이라고도 볼 수 있어요. 그런데도 결국은 부활하셔서 가장 높은 자가 되셨습니다. 긴 역사 속에서 보면 이 세상 그 누구보다 훌륭하고 성공적인 삶을 사신 것으로 만인이 추앙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탄생 모습을 생각해보면, 하느님의 축복이 우리가 생각하듯 꼭 영광으로만 오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온갖 수난과 장애로 오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수난이 하느님의 축복인 줄 알지 못해서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고 수난을 피해가려 합니다. 실제로는 그 수난과 고통이 하느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축복이고 하늘 나라로 가는 유일한 길인데도 오늘 우리는 그 길을 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 25장 31절부터 보면 최후의 심판 날 천국과 지옥에 가는 심판의 그 기준이 무엇인지 나옵니다. ‘주께서 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었느냐?’,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느냐?’, ‘헐벗었을 때 옷을 입혀주었느냐?’,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했느냐?’, ‘병들었을 때 보살폈느냐?’,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을 때 면회 왔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생존의 위협을 받는 사람들, 다시 말해 굶주리는 사람, 병든 사람, 고향을 떠나 피난길에 오른 난민들, 죄 없이 감옥에 갇혀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내가 어떻게 했느냐가 기준이에요. 


그런데 오늘 우리들은 그런 사람들을 외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은총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유럽이 기독교 국가라고 하지만 오늘날 유럽을 향해 오는 중동 난민들을 유럽 사람들이 어떻게 대하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유럽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 역시 이 땅에 온 많지 않은 무슬림, 이주민들을 벌써 잠재적 테러범으로 취급하면서 테러방지법을 만든다며 난리를 피우는 것을 보면 이것은 종교와 관계없는 인간의 어떤 야만성을 보여주지 않나 싶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우리들에게 분명히 구원의 희망을 주는 것이지만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의 희망과는 다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오심을 통해서 우리는 어떤 구원의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요? 




지금 실패하고 패배하고 큰 어려움에 처한 처지가 단기적으로 보면 실패지만, 주님의 삶을 생각하며 길게 본다면 이것은 결코 실패한 삶이 아니고 패배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성공으로 가는 어떤 출발점일지 모릅니다. 우리들이 겪고 있는 이 고난은 그 분이 겪으신 고난에 비하면 고난이라고 할 것도 없어요. 그러니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이 어려움 속에서 신앙의 힘으로 이 어려움을 극복해내야 합니다. 즉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나만 희망을 갖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절망에 빠진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가 희망의 메시지인 복음을 전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의 마지막 모습, 즉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두고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라고 말씀하시는 모습에서 저는 깊은 영감과 믿음을 얻었습니다. 지금까지 유대교에서 전해 내려오는 하느님은 죄를 응징하는 하느님이었는데, 예수님 이후의 하나님은 죄를 응징하는 하느님에서 죄를 용서하는 하느님이 되셨어요. 


또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에서 보면 유대인만을 구원하는 폐쇄적 구원관이 아닌 이방인까지도 구원하는 열린 하느님과 개방된 구원관을 보여 줍니다. 나만을 사랑하는 하느님에서 만백성을 똑같이 사랑하는 하느님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또한 예수님을 통해 신앙관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의 오심을 통해서도 자기성찰을 하지 못하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기에 신앙이 바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그 땅에는 미움과 증오, 복수가 계속되는 게 아닐까 합니다.



오늘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기독교인 중에서도 일부이기는 하지만 증오와 복수로 신앙을 삼는 사람들이 아직 많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북한을 미워하더라도 신앙인들은 그들을 미워하고 용서할 수 있어야 할 텐데 오히려 일반인들보다 더 나서서 미워하고 증오하고,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진정한 크리스천이라면 이해하고 포용해야 할 텐데 오히려 더욱 배척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은 기독교 신앙에 위배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기독교냐 불교냐 하는 논의를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느님이 보시기에는 불교인들도 다 하느님의 창조물이고 하느님의 백성이지 않습니까? 문제는 ‘신앙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어떤 신앙을 갖느냐’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정말로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질 수 있는 신앙인지를 성탄절을 맞아 생각해봐야 하겠습니다.


제가 어릴 때 배운 찬송가 중에 이런 찬송가가 있습니다. 초등학생 때 배워서 제목은 기억이 나지 않고 곡도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불러보겠습니다.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아가기 원합니다. 

(청중 환호하며 박수)



노랫말에서 보듯이 우리가 주를 가까이 한다는 것은 십자가를 짊어진다는 뜻입니다. 십자가를 짊어지는 그 속에서 행복을 찾아야지, 물질적인 축복을 받는 데서 행복을 찾는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어릴 때 배운 노래니까 잊어지지가 않는데, 저는 통일운동을 하니까 통일운동을 하는 자세도 이 노랫말과 같다고 생각해요. 통일을 원한다면 분단의 갈등 속에서 뿌리내려온 증오와 미움이라는 십자가를 짊어질 각오를 해야 합니다. 증오하는 양쪽으로부터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일이에요. 그러니 우리가 통일 조국을 건설하는 것이 진정한 소원이라면, 그걸 기쁜 마음으로, 찬송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에만 이 운동을 꾸준히 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야 통일에 한발 더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중간에서 그만두게 됩니다. 


가톨릭 순교의 역사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아무 죄도 안 지었는데, 다시 말해 남을 때리지도 않고, 도둑질하지도 않고, 성추행하지도 않고, 거짓말하지도 않고, 술에 취해서 행패부리지도 않았는데, 그저 기독교 신앙을 가졌다는 한 가지 이유로 죽임을 당하면 억울하고 분할 수밖에 없잖습니까? 그런데도 사형당하는 형제들 간에 웃으면서 ‘잘 가라. 천국에서 점심 먹을 때 보자’라고 인사나눌 수 있는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신앙입니다. 과연 우리가 죽음 앞에서 이렇게 원망 없이 웃으며 우리의 신앙을 지킬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권세 있는 자를 위에서 내리치시고 비천한 자를 높이셨습니다. 그래서 만인을 평등하게 하셨어요. 오늘날 이 땅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는데 권세 있는 자에게 빌붙는 비굴한 삶보다는 가난하고 천대받는 사람과 함께함으로 해서 하느님의 영광을 누리는 삶을 우리가 함께 실천하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며 오늘 예수님 오신 뜻을 다시 한 번 새겨봅니다. 감사합니다.” 


스님의 성탄절 축하 강론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참뜻이 무엇인지 가슴 절절히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말씀이었습니다. 


신부님은 스님의 강론을 열심히 경청한 후 “스님께서 예수님 탄생의 의미와 십자가의 신비에 대한 신학적 고찰에 대해 주임 신부인 저보다 더 잘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라며 웃었습니다. 


▲ 쑥고개 성당 김홍진 신부님 


함께 자리한 교인들도 웃음을 띠며 다시 한 번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이어서 김대성 원불교 교무님의 축한 인사가 이어졌고, 세 분의 종교지도자의 말씀이 모두 끝나자 신부님은 스님과 함께 온 정토회 식구들, 교령님과 함께 온 천도교 식구들을 모두 불러 일으켜서 인사를 시켜 주었습니다. 환영의 박수가 계속 이어졌습니다. 


▲ 성당 식구들에게 인사하는 정토회 회원들


이렇게 성탄절 미사에 4대 종교가 함께하는 모습은 그 모습 자체만으로 참 감동이었습니다. 


이웃종교인들이 함께 어우러지며 훈훈한 열기를 더해가고 있는 가운데 드디어 본격적인 미사가 진행되었습니다. 가장 눈에 띈 건 세례명을 주는 의식이었는데 총 19명의 천주교인들이 대부, 대모와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거룩한 의식을 가졌습니다. 웅장한 찬송가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여러 차례 십자가 앞으로 나오게 하여 한 명 한 명을 예수님이 가신 그 길로 인도해주는 모습은 아주 거룩한 분위기를 자아내었습니다. 


▲ 세례를 받고 있는 천주교인들


이렇게 2시간 동안의 성탄절 미사를 모두 마치고 오후 1시부터는 성당 2층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성당에서는 몇몇 분들이 아침 일찍부터 떡국과 갖가지 반찬을 정성껏 준비했다고 합니다. 맛있게 떡국을 먹으며 신부님이 주신 미사주를 잔에 붓고 다함께 건배를 했습니다. 


특히 성당에서도 청년들이 20여 명 참께 했고, 정토회에서도 20여 명이 함께 자리해 서로 마주 앉아서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김홍진 신부님은 “이웃 종교에 대해 서로 궁금한 것이 많으시죠?” 라며 잠시 즉문즉설의 시간을 갖자고 했습니다. 각자의 종교에 대해 궁금한 점에 대해 끼리 끼리 대화를 나누던 청년들은 이제 본격적으로 스님과 신부님, 교령님, 교무님 네 분의 종교지도자들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쑥고개 성당에 다니는 한 분은 “요즘 저희 성당에서는 서로 일을 도맡아 하려고 하지 않고, 앞에서 끌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너무 힘듭니다. 스님의 조언을 받고 싶습니다.”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망설임 없이 곧바로 대답을 해주었습니다. 




“저희 정토회도 똑같아요. 방법이 없어요. 쑥고개 성당에 다니는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책임지고 하는 일은 가능한 안 하려고 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할 해답이 있으면 누가 저한테도 좀 이야기해 주시면 좋겠어요.” (웃음) 


예상치 못한 짧은 대답에 모두가 크게 웃었습니다.  질문자가 “알겠습니다.”하고 자리에 앉자 스님도 “이것 봐요. 답을 주지 않아도 해결이 되어버리잖아요.” 하며 웃었습니다. 




이어서 성당과 정토회의 청년들 간의 교류와 친목의 시간이 펼쳐졌습니다. 스님은 교류의 시간을 갖기에 앞서 오늘의 만남이 갖는 의미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종교 지도자 간의 교류는 예전부터 많이 있어 왔지만 오늘처럼 신자들 간의 교류는 거의 없었어요. 종교 지도자들이 신자들을 못 믿었나 봐요. 혹시 교류하다가 양떼 잃어버릴까 걱정이 되어서요. (모두 웃음) 



그러나 이제는 지도자 간에만 이루어지는 제한된 교류가 아니라 좀 더 전면적인 교류가 필요합니다. 지금처럼 사월 초파일과 크리스마스에 서로 오가는 것뿐 아니라 우리가 앞으로 교류를 더 넓혀 나가면 공동 활동을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구 환경을 살리는 운동에서 공통점을 찾아 함께 할 수도 있고, 국제 구호활동도 선교나 전법이라는 목적을 떠나 인류애로서 함께 할 수 있고, 공동 바자회를 함께 열거나 통일운동을 함께 해볼 수도 있어요. 


불교인이냐 기독교인이냐를 떠나 우리 사회에서 함께 살면서 겪어야 하는 공통의 문제와 해결과제를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간다면 그 과정에서 각자의 신앙도 더 깊어지리라 생각합니다. 교리를 비교해서 공통점이 있네 없네 따지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예요. 믿음은 각자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문제는 우리 모두가 그 속에서 같이 살아가는 것이니까 머리를 맞대고 함께 의논해볼 수 있어요. 그런 측면에서 이런 교류 활동들이 더 넓어지면 좋겠습니다. 



신자님들이 더 많이 오시면 좋았겠지만 공간이 제한되어 있어서 오늘은 우선 양쪽의 젊은이들만 20여 명씩 초대해 이렇게 모였습니다. 그러니 청년 여러분들은 대화를 활발히 나눠주세요. 


오늘은 신부님이 식사도 술도 다 내주십니다. 다이어트는 잊고 실컷 먹으면서 대화 나누고, 무엇이든 질문도 하세요. 질문하는 사람은 질문하기 전에 노래 한 곡을 하면 더 좋겠습니다.” (모두 웃음)


스님의 제안에 먼저 정토회에서 온 청년들이 미리 준비해 온 크리스마스 캐롤송과 율동을 보여주었습니다. 두 곡을 준비했는데 첫곡은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아주 멋지게 불러주었습니다. 이어서 경쾌한 멜로디의 “울면 안돼” 노래를 재미있는 율동과 함께 보여주었습니다. 


▲ 크리스마스 캐롤송에 맞춰 율동을 보여주고 있는 청년정토회 멤버들


불자 청년들이 부르는 크리스마스 캐롤송과 재미있는 율동에 성당에서 온 청년들과 신부님, 수녀님들은 박장대소를 하며 웃고 즐거워했습니다. 




이어서 쑥고개 성당 청년들도 즉석에서 답가를 해주었습니다. “아름다운 세상” 이라는 노래를 반주에 맞춰 멋지게 불러주었습니다. 성가대를 하는 청년들이 많아서 그런지 다들 평범한 실력이 아니었고, 노래가 끝나자 정토회 청년들은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 답가를 부르고 있는 쑥고개 성당 청년연합회 멤버들


청년들끼리 이렇게 교류하는 모습을 보고 박남수 천도교 교령님은 짧게 소감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종교 간의 화합이 바로 이것입니다. 책에서 보거나 법문이나 강론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보여주었잖아요. 정토회에 다니시는 분들이 남의 성당에 와서 이렇게 춤추고 노래하고 서로 대화하는 이런 모습이 바로 젊은이의 용기입니다. 이런 젊은이들의 용기야 말로 종교 간의 평화도 만들도 남북의 평화와 세상의 평화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령님은 큰 감동을 받은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김대성 원불교 교무님도 “정말 감동적인 모습이었다”고 소감을 이야기해 주자 양쪽 청년들은 모두 공감을 표하며 함께 박수를 쳤습니다. 



이렇게 한껏 어우러진 후 즉문즉설의 시간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누구는 원불교에 대해, 누구는 천주교에 대해, 누구는 불교에 대해 허심탄회한 질문들이 쏟아졌고, 각 종교 지도자들은 알기 쉽게 대답을 해주어 청년들도 무척 좋아했습니다. 


법륜 스님은 오후 3시부터 또다른 미팅 일정이 약속되어 있어 양해를 구하고 중간에 자리를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웃종교인들의 아름다운 만남은 오후 늦게 까지 계속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