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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콘서트

청춘콘서트, 안철수에게 기립박수를 보낸 이유

안철수와 박경철의 청춘콘서트 현장에 다녀왔습니다. 전국 32개 모든 도시에서 표가 매진되는 사태가 빗어지며 인기 절정을 달리고 있는 청춘콘서트가 이번에는 부산 부경대에서 열렸습니다. 취재를 위해 서울에서 부산까지 왕복 KTX를 탔더니, 아무리 무료 강연이라 하지만 배 보다 배꼽이 더 크다고 차비가 더 들었습니다.^^ 부산 부경대 대학극장을 가득 메운 1200명의 부산 시민들은 두 멘토의 열정적인 강연 속에 흠뻑 빠져 들어갔습니다. 오늘은 안철수의 끊임없는 도전의 원동력에 대한 이야기가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의대 교수에서 바이러스연구소로, 바이러스연구소에서 벤쳐 기업으로, 벤쳐 기업에서 경영학을 공부하는 학생으로, 학생에서 대학교수로, 대학교수에서 이제는 대학원장으로... 편안함을 뒤로하고 끊임없이 변화와 도전을 해온 안철수, 그 원동력이 무엇인지 공감할 수 있어서 참 감명깊었던 시간이었습니다.

▲ 부산부경대 대학극장 앞, 무더운 날씨였지만 청춘콘서트를 듣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몰려 인사인해를 이루었습니다.

- 박경철 : 안선생님과 저는 진짜 의사가 맞다.(청중들 웃음) 저는 26살에 의대를 졸업을 했는데, 안선생님은 27살에 의대 학과장을 했다. 의사로서도 굉장히 탁월했다. 의료인들 사이에서는 안선생님이 계속 의사를 했다면 의학 발전에 더 큰 공헌을 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불연 듯 껌껌한 데서 컴퓨터 붙잡고 바이러스를 치료하고 백신을 연구하는 길로 갔다... 그러더니 중소기업 창업을 하셨다. 주위에서 많이 반대했을 텐데 왜 그랬는가?

- 안철수 : 살아오면서 사회로부터 받은 것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도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다.

의대를 다니면서 사회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니까 의료봉사활동이 있더라. 틈날 때 마다 열심히 봉사활동을 했다. 그러다가 대학원을 가게 되니까 의료봉사를 더 이상 못하게 되었다. 그 때 마침 논문 쓰고 실험한다고 컴퓨터를 사용하다가 바이러스를 발견했다. 나름대로 열심히 연구해서 백신을 만들어 보급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고마워하더라. 이 일을 통해 내가 사회에 보답을 할 수 있겠구나 생각해서 의사 일과 백신 개발하는 일을 계속 병행하게 되었다. 7년간을 두 가지 일을 병행하다가 어느 순간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다가왔다. 돌아보니 의료계는 제가 빠져도 잘 돌아갈 수 있었지만 백신 쪽은 제가 없으면 안 돌아가는 상황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백신 쪽으로 간 것이다.

- 박경철 : 서울대 졸업해서 나름대로 의사의 길을 가던 아들이 난데없이 돈 안 되는 사업을 하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이 얼마나 반대했겠는가? 아내와 주변 친구들은 반대를 하지 않았겠는가?

- 안철수 : 지금도 고마운 게, 의사를 그만둔다고 했을 때 찬성도 안하셨지만 반대도 안하시더라. 나중에 물어보니까 항상 치열하게 고민하고 신중히 선택해왔던 과거의 모습을 봐왔기 때문에 그러셨다 하더라. 저도 마음이 약해서 가족이 강하게 반대했으면 절대로 못했을 것이다. 다행이 가족이 믿어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박경철 : 왜 믿어주지 않느냐고 말하기에 앞서 나부터 주위에서 나를 믿어주도록 좋은 모습을 보여줘 왔는가 살펴봐라. 많은 사람들이 지금 하는 일이 적성이 안 맞아 새로운 길을 가고자 하지만 두려움이 크다고 한다. 그럴 때 과연 내가 그 일에 최선을 다했는지 자문해 봤으면 좋겠다. 안 선생님은 두 가지 일 모두를 최선을 다해서 병행 하면서 스스로 설 수 있을 때 비로서 선택을 했다. 게다가 자신의 피와 땀으로 개발한 백신을 모두 무상으로 보급했다.

- 안철수 : 일반인들에게 계속 무료로 보급을 해주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재정 기반이 필요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해 준 기업과 관공서에서는 돈을 받을 수 있다고 봤고 그래서 창업을 했었다. 최근 소셜 벤처기업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는데, 지금 되돌아보면 이미 14년 전에 안연구소가 그런 역할을 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월말이면 아무리 계산을 해봐도 그 달 직원들 월급을 다 못주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매달 은행에 가서 어음 깡을 했다. 담당 은행직원에게 빌고 그랬다. 그 습관이 남아서 10년이 지난 지금도 월초가 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기분이 이상하다.

- 박경철 :  안선생님은 회사 사장을 하다가 다시 또 경영학을 공부하는 학생이 되었다. 와튼 스쿨까지 가서 공부를 했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대학교수를 했다. 그러다가 또 융합기술대학원이라는 이상한 곳으로 갔다.(ㅋ) 이렇게 끊임없이 변신을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천재성에 대한 확신이신가? (청중들 웃음) 

- 안철수 : 의대 봉사 시절 때 정말 많이 배웠다. ‘구로동’이면 정말 달동네였다. 돈이라는 것이 항상 사람 밑에 있다고 생각해 왔는데, 달동네에서 봉사하면서 돈이 너무 없으면 돈 밑에 사람이 깔리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두 부부가 입에 풀칠할 만큼 벌면서 함께 살고 있었는데, 한 사람이 아프게 되니까 돈 때문에 가족공동체가 깨어지게 되더라.

어떤 할머니가 류마티스 관절염이 심해서 거동을 못하신다고 해서 왕진을 갔다. 엄마는 도망가고 아빠는 돌아가시고 손녀와 할머니만 살고 있더라. 결국 할머니가 거동을 못하니까 손녀가 신문팔이를 하며 할머니를 먹여 살리고 있었다. 얼마 지난 후 다시 가보니까 손녀가 도망을 가서 할머니가 굶어 죽었더라. 저도 열심히 살아서 사회기득권층이 되었지만, 그 기억들이 항상 사회와 내 주위를 둘러보게 하는 중요한 동기가 된다. 
 
안연구소에서 최초로 100억 매출을 달성했을 때였다. 안연구소는 잘나갔지만 주위를 둘러보니 어려운 중소기업들이 너무나 많더라. 나만 잘 될 것이 아니라 산업 전반적인 성공확률을 높여주고, 이렇게 절망하는 청춘들에게 도전의식을 심어주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것이 안연구소를 나오게 된 계기이다.

나오고 나서 생각해보니 내가 당장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없더라. 제 경험만으로는 안 되고, 경험을 체계화하고 지식의 저변을 넓혀야 했다. 사장으로서는 잘했지만 다른 사람을 도와주기는 많이 부족했다. 그래서 학생으로 돌아갔다. 학생 신분으로 유학을 간 이유가 그래서였다. 돌아와서 원래 생각해왔던 일들을 할 수 있었다. 대학원 시작할 때 다짐했다. 5년 후에는 모든 사람들이 내가 원래 대학교수였다고 착각할 정도로 노력해보자. 지금 5년이 지났다. 얼마 전 어떤 사람이 그러더라. “아니 평생 학교에만 있었던 사람이 기업을 어떻게 아는가?” 라고. 저는 10년간 기업 경영하고 어음 깡 하면서 살았던 사람인데...(청중들 웃음) 그래서 ‘내가 잘 살았구나!’ 하며 기분이 좋았었다.

- 박경철 : 사람은 누구나 인생을 살아가면서 삶의 기준이 있어야 한다. 내가 생각할 때는 ‘이것이 가치 있는 일이다’는 것을 바라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성인이라면 ‘당신의 가치관은 무엇입니까’ 물어보면 1초 만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 대답을 못한다. 기준이  없으면 남을 짓밟는 성적과 등수가 최고인 줄 안다. 그렇게 돈을 벌면 돈을 다 벌고 나서 인생 전체가 허무해질 수 있다. 잘나가던 대기업 총수들이 자살하는 것을 봐오지 않았는가. 가치 있는 것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나가야 한다. 이게 바로 도전이다. 여러분들도 이런 토대 위에서 다양한 경험들도 함께 쌓아나가면 좋겠다.  

▲ 강연이 끝나자 모두가 일어나서 기립박수! 감동이 온 몸에 고스란히 전해져서 전율이 일었습니다.

부산 시민들의 뜨거운 박수가 쏟아집니다. 저도 모르게 환호를 하고 기립박수를 보냈습니다. 저 뿐만이 아니라 청중 모두가 자연스럽게 일어나서 기립 박수를 보냅니다.

안철수 교수의 도전 정신의 원동력은 쉽게 생각하듯 단순히 ‘안정’과 ‘전망’을 찾아 이리 저리 옮겨 다닌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회로부터 받은 것에 대한 환원 정신이었습니다. 사회로부터 받은 것에 대한 보답을 통해 함께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가고자 했던 마음이었습니다. 대학시절 의료 봉사할 때로부터 시작해서 늘 자신이 사회로부터 많은 것을 받아왔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되갚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왔던 것입니다. 백신을 개발하게 된 것도 많은 이들이 바이러스로 인한 피해가 막대하니까 그것을 통해 사회에 공헌하고자 했던 것이고, 기업을 경영하다가 학생신분으로 돌아가게 된 것도 벤쳐 기업들의 성공확률을 더 높여주고 좌절하는 청년들에게 도전정신을 심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청춘콘서트를 위해 소중한 시간을 할애하고 무료 강연을 해주시는 것도 모두 청년들에게 새로운 꿈과 희망을 이야기해주기 위함이겠지요. 저처럼 이런 과정들을 생각하니 모든 청중들이 기립박수를 절로 치게 되었을 겁니다.

한국 사회에 이런 분이 있어서 참 자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 사회에도 존재 자체로 희망을 주는 그런 사람이 있구나.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청춘콘서트가 전국 32개 도시를 순회하다보니 과로로 인해 목소리가 많이 잠기셨었습니다. 입술도 부르텄고요. 온 힘을 다해 강연하시는 모습 자체도 감동이었습니다.

기업의 CEO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기업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고 사회 전체의 공공성을 높이는 데 노력한 사람. 사익을 추구했다면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을 텐데, 자신의 성공은 사회의 도움 덕분이라며 그 이익을 모두 사회로 환원하고 있는 사람, 안철수! 이제 한국 사회에서도 이런 공공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나왔으면 하고 바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