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리처드 사무엘스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교수는 자신의 저서 『부국강병(Rich Nation, Strong Army)』에서 전전(戰前)의 일본인들을 침략주의로 내몰았던 힘이 바로 대중적 불안감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일본의 지도자들은 대중의 불안감을 원동력 삼아 대화와 타협을 선택하기보다 역으로 대결로 나아갔다.
일본의 본격적인 재군비와 집단적 자위권 허용 본격화
21세기 들어 일본은 오랜 경제침체 속에서 중국에 세계 2위의 경제대국 자리를 내주었을 뿐만 아니라, 후쿠시마 원전사태로 사회불안감이 만연한 상황을 맞고 있다. 게다가 해상영토분쟁과 과거사 문제로 주변 국가들과 갈등을 빚고 있다. 이러한 대내외적 한계상황에서 일본은 과연 또다시 대결의 길을 선택할 것인가?
지난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승리한 아베 정권은 헌법 해석을 바꿔 평화헌법의 전수방위 원칙을 무력화시키는 방향으로 집단적 자위권을 조건부 허용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오는 12월 새로 작성될 「신방위대강」에 담길 것으로 보인다.
또한 히로시마 피폭일인 8월 6일에 맞춰 대잠(對潛) 헬기 14대를 탑재할 수 있는 배수량 2만 7천 톤의 항공모함급 구축함을 진수하였고, 오는 9월경 중국을 ‘적’으로 가상한 대규모 섬 탈환훈련을 실시할 계획이다. 뿐만아니라 8월 15일 소위 ‘종전기념일’에 맞춰 각료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도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제 역대 일본정부가 내놓은 과거사 반성에 대한 3대 담화인 미야자와 담화(1982.8.26. 역사교과서 기술의근린조항), 고노 담화(1993.8.4. 위안부 강제동원의 인정과 사과), 무라야마 담화(1995.8.15. 식민지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죄)도 차례차례 무력화시키려는 움직임마저 나타나고 있다.
이를 통해 일본은 개헌요건을 담은 헌법 제96조의 재적의원 3분의 2 찬성 조항을 2분의 1 찬성으로 낮추도록 개정한 다음, 이를 바탕으로 군대 불보유와 전수방위를 규정한 헌법 제9조를 변경하는 작업을 본격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한반도 영향력 확대와 개입주의
그렇다면, 최근 중국의 움직임은 어떠한가? 지난 한·중 정상회담에서 양국은 우호관계를 확인하고 향후 관계 발전을 약속했다. 시진핑 주석은 “천리 밖 끝까지 다 바라보려고 다시 누각을 한 층 더 오르네(欲窮千里目 更上一層樓)’라는 당시(唐詩)의 구절이 담긴 액자를 박근혜 대통령에게 선물해 한·중 양국의 발전이 한 단계 더 성숙하기를 기원하는 바람을 나타냈다.
하지만, 각론에 들어가면 사정이 달라진다. 중국 내 권력서열 3위이며 한반도 전문가인 장더장(張德江)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은 박 대통령과 면담하면서 북한을 대할 때 3심(善心·耐心·動心)이 필요하다며 충고하였다. 이에 박 대통령은 한국과 중국만큼 북한에 인내하는 나라가 어디 있느냐며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북핵문제에 대한 한·중 간 인식차는 좁혀지지 않았고, 특히 한반도문제에 대한 중국의 태도는 더욱 개입적으로 바뀌었다. 중국은 시진핑 주석의 직계인 리위안차오(李源潮) 국가부주석을 특사자격으로 북한의 정전협정 기념일에 파견하여 시 주석의 축하메시지를 전달하고 혈맹관계를 과시했다.
최근 모 조간신문은 “평화협정 체결, 북핵 인정하는 것”이라는 제하의 1면 톱기사로 중국공산당 당교 장렌구이(張璉瑰) 교수의 발표내용을 보도했다. 제목만으로는 마치 중국이 평화협정을 반대하는 듯 보이지만, 그의 발표내용은 △동아시아 평화·안정 관련국들의 한반도 평화협정 공동 체결, △한반도 평화협정과 북핵문제의 동시해결로 요약할 수 있다.
장 교수가 밝힌 북핵문제 해결 없이 평화협정 체결도 없다는 원칙은 ‘9·19공동성명’에 나온 것으로 새로울 것이 없다. 하지만 동아시아 평화·안정 관련국들이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에 공동으로 참가해야 한다는 점은 논란의 소지가 있다. 한반도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군사정전위원회에서 빠진 중국이 한반도 평화문제에 적극 개입하겠다는 의사 표현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이미종중(離美從中)론과 대미 일변도 외교로의 복귀?
우리와 이웃한 일본과 중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데 비해, 6월 초 정상회담 이후 미·중 양국관계는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7월 초에 있었던 아세안지역포럼(ARF)에서 미국은 기존 태도와 달리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을 중시하고 중국을 압박하는 자세를 드러내지 않았다. 이 때문에 동남아 현지에서는 미국의 ASEAN 중시정책이 약화된 것이 아니냐는 우려마저 제기되었다.
반면, 일본은 한국·중국과 타협하고 양보하기보다는 미국 및 ASEAN 외교를 강화하며 정면 돌파를 시도하고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베 총리는 중국 주도의 동아시아 경제통합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이 주도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의 협상에 참가한다고 선언한 데 이어, 작년 12월 취임 이후 3차례나 ASEAN 국가들을 방문하여 경제협력을 약속하며 중국과 영토분쟁을 빚고 있는 국가들의 규합에 나섰다.
뿐만 아니라, 일본은 북·일 접촉을 통해 아베 총리 방북설을 흘리면서 한국에 대한 견제에도 나서고 있다. 최근 들어 ‘한국이 미국을 떠나 중국을 따른다’는 이른바 ‘이미종중(離美從中)’론을 유포시켜 한·미 관계를 이간시키기까지 하고 있다. 이는 북한과 미국 카드를 이용해 한국을 외교적으로 굴복시켜 보려는 속셈이 담긴 것이다.
이런 정세 속에서 우리 정부는 한·중 관계의 발전에 대한 미국의 경계심과 일본의 한·미 이간 책동을 우려해, 정권 초기에 내세웠던 ‘균형외교(alignment policy)’의 방향과 달리 점차 미국에 대한 과잉접근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미국을 붙잡아두기 위해 2012년 4월에 예정됐던 전시작전권 전환을 2015년 12월로 미룬 데 이어, 이번에는 아예 무기한으로 전작권 전환을 늦추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차세대전투기사업(FX)에서 미국을 의식해 입찰조건을 변경하고 있다는 의혹마저 사고 있다.
중국과 가까이 하자니 미국의 눈총이 두렵고, 대북정책에서 우리 입장에 대한 중국의 전폭적인 지지를 보장받는 것도 아니다. 미국으로 달려가자니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우경화하는 일본과 악수를 해야 하는 상황으로 이어질 게 뻔해 이명박 정부의 외교실패를 되풀이할 수 있다. 이른바 박근혜 정부의 외교가 벌써부터 딜레마에 직면하게 될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남북관계를 조속히 안정시키자
이처럼 박근혜 정부가 외교적으로 딜레마에 처한 가운데, 남북관계 경색이 지속되고 있다. 이미 6차례에 걸친 개성공단 실무협상이 결렬된 데 이어, 7월 29일 통일부 장관의 성명을 통해 ‘중대한 결단’을 경고하며 최후통첩성 대북회담 제의를 내놓았다. 하지만 아직까지 북한은 묵묵부답이다.
▲ 정상 가동할 때의 개성공단
8월 5일 개성공단 입주기업에 대한 정부의 경협보험금 지급심사라는 행정절차가 끝났기 때문에, 이제 보험금만 지급하면 개성공단 내 해당 기업의 자산은 모두 정부 소유로 된다. 이렇게 되면 단수·단전 등 정부가 언급한 개성공단에 대한 ‘중대한 결단’을 내리기가 훨씬 쉽게 된다.
그렇다면 왜 박근혜 정부는 개성공단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견지하는 것일까?
통일부 대변인이 밝힌 공식적인 이유는 북한이 정치군사적인 이유로 언제라도 공단운영을 중단시킬 수 없도록 재발방지조치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재발방지조치 없이 개성공단을 재가동한다면 언제라도 지금과 같은 사태가 발생하지 말라는 법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 정부의 속내는 다음 두 가지 이유인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우리 측 요구를 수용해 ‘개성공단의발전적 정상화’가 이루어진다면 이른바 ‘노무현표 개성공단’을 ‘박근혜표 개성공단’으로 바꿀 수 있는 정치적 성과를 얻을 수 있다. 설사 북측이 이를 거부해 개성공단이 폐쇄되더라도 ‘북한 위협론’을 내세운 대미 일변도 외교로의 복귀에 따른 중국의 반발을 완충시킬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우리 정부는 개성공단 사태를 국내정치적으로, 외교전략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것은 우리의 외교적 딜레마만 심화시킬 뿐 한반도 주변정세에 대한 올바른 대응방향이라고 할 수 없다. 남북관계가 대결과 긴장의 구도에 갇혀 있는 한 우리가 정세변화를 주도하기는 어려우며, 오히려 정세변화의 종속변수가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남북관계가 불안정하고 긴장상태가 심화되면 주변정세의 불안정 상태를 더욱 증폭시킨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그런 의미에서 개성공단 사태는 우리가 타협을 선도하여 하루속히 마무리 지어야 할 하나의 시금석이다.
우리 정부가 외교적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길은 조속히 남북관계를 안정화시켜 한반도 변수를 최소화하면서 대미·대중·대일 외교를 전개하는 것이다. 또한 현재와 같이 잠정적으로 일시 조성된 협력 우선의 안정된 미·중 관계를 적극 활용해 한반도 평화체제와 비핵화 논의를 주도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박근혜 정부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가 ‘신뢰’를 되찾고,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을 실현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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