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초기 100일을 악화된 남북관계와 안보 위기 속에서 보냈다. 북한의 3차 핵실험(2.12)과 이에 대한 유엔의 대북제재결의(3.8, 제2094호)로 인해 한반도 상황은 대결과 긴장 일변도로 내달았고, 남북교류협력의 최후 보루인 개성공단도 지난 5월 3일 남측 인원의 전원철수로 폐쇄가 우려되는 파국 상황에 직면하였다.
남측 제의를 전격 수용한 북한의 특별담화
북한은 통일부 장관의 당국대화 제의(4.11)와 개성공단 실무회담 제의(4.25)를 거부하고, 우리 정부는 ‘6·15 공동행사’와 관련된 북측 제의에 대해 불허방침(5.27)을 밝히면서 남북관계 국면전환에 꽤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는 전망이 우세해지고 있었던 참이었다.
▲ 분단상징 군사분계선 넘는 북측대표단. 남북장관급회담을 위한 실무접촉이 9일 오전 판문점 우리측 '평화의 집'에서 열리는 가운데, 북측 김혜성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 부장, 황충성, 김명철 등 대표단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다. (사진, 통일부 제공)
이런 상황에서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6월 6일 대변인 특별담화문을 통해 ‘6·15를 계기로 개성공업지구 정상화와 금강산관광 재개를 위한 남북 당국 사이의 회담’을 가질 것을 전격 제의하였다. 북한이 기존 입장을 번복하고 우리가 꾸준히 요구해온 당국 간 회담을 두 달 만에 수용한 셈이다. 아울러 금강산관광 재개와 이산가족 상봉 등 인도주의 문제도 협의하자는 추가적 의제까지 들고 나와, 망외(望外) 소득에 대한 기대도 갖게 하였다.
6월 9일에 이루어진 쌍방 실무접촉 과정에서 대표의 급과 의제 등으로 서로 간에 밀고 당기는 신경전과 합의문의 미묘한 차이도 있었지만, 6월 12일과 13일에 서울에서 남북당국회담을 개최하기로 최종 합의되었다. 여당에서는 박 대통령의 단호한 원칙 견지와 뚝심이 이룬 성과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에 대해 “한반도 신뢰프로세스가 북한의 변화를 이끌었다고 자축할 것이 아니라 실질적 성과를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하기는 했지만, 야당도 오랜만의 남북당국 간 회담재개를 일제히 환영하고 있다.
그렇다. 꽉 막힌 남북관계에 빗장을 여는 일은 여야를 떠나 초당적으로 모두 환영하고 지지할 사안이다. 어떤 경우에도 남북 간 대화는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 온 겨레의 바람이기도 하다. 이번에 입장을 바꾸어 대화재개에 나선 북한의 결단에 대해서도 찬사를 보내고 싶다.
북한이 입장을 바꾼 의도는?
얼마 전까지 “개성공단을 정상화하려면 남측이 군사 도발을 중지해야 한다”면서 당국회담을 거부했던 북한이 입장을 바꾼 의도와 배경은 무엇일까?
첫째, 우선 3차 핵실험 이후 전개되어온 한반도 긴장과 남북 간 대결 국면을 더 이상 무리하게 끌고 가는 것은 북한 자신의 외교력과 군사력만 무의미하게 소진시킬 뿐이라는 현실적 제약이 감안되었을 것이다. 3차 핵실험 직후 생성된 강경 기류의 국제사회 분위기가 이제 어느 정도 가라앉았고, 강도 높게 실시된 한·미 군사연습도 종료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 민간 기업인이나 시민단체를 대상으로 우리 정부를 압박하려던 북한의 계획도 힘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조업중단 사태가 더 이상 장기화되면 개성공단 재개 논의의 모멘텀 자체를 아예 잃어버릴 수 있다는 계산도 했을 수 있다. 금강산 관광중단이 장기화되면서 남북당국 간 관광재개 논의 자체가 사실상 실종된 전철을 밟게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셋째, 김정은 권력승계 이후 내부적인 핵보유국 운용체제와 통치기반을 1차 마무리한 시점에 ‘핵·경제 병진노선’의 본격 시행을 위한 환경조성 차원에서 남북 간 긴장완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이 점은 북한이 이번 당국회담에서 이산가족 상봉 문제를 논의하고 ‘6·15 공동선언’뿐만 아니라 ‘7·4 공동성명’의 남북공동행사 개최 문제도 논의할 수 있다고 언급한 데서 짐작할 수 있다.
넷째, 북한은 동북아 질서 변화라는 보다 큰 틀 속에서 이번 회담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조평통’이 특별담화를 발표하기 보름 전, 김정은 제1위원장의 특사인 최룡해 총정치국장이 중국의 시진핑 주석에게 친서를 전달하였고, 비슷한 시기 미국 국무부 주요인사가 예정된 방한일정을 분명치 않은 이유로 취소하고 베를린에서 북한 외무성의 리용호 부상을 비밀리에 만났다. 또한 지난 6월 7~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오바마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이 미·중 정상회담을 가졌다. ‘조평통’ 특별담화는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남북당국자 회담을 제안한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의 동북아 질서 변화에 북한이 선제적으로 대응하려는 의도도 읽혀진다.
이제 남북 간에 6년 만에 남북 당국회담이 재개된다. 그동안 남북 간에는 서로를 비방하고 책임을 전가하며 불신의 벽을 얼마나 높이 쌓았는지 모른다. 남북관계는 마치 냉전시대로 돌아간 듯 냉랭하고 불편한 관계를 지속해왔다. 이번에 당국회담이 성사되어 현안에 대한 서로의 입장을 논의할 장이 마련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소통 단절의 폐해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남북당국회담에 바란다, 잘잘못 따지지 말고 미래를!
첫째, 이번 회담은 상대방을 굴복시키거나 결판을 내기 위한 회담이 아니다. 또한 과거의 잘잘못을 따지는 회담이 아니라 미래를 여는 회담이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이번 회담을 한반도 대결국면을 대화국면으로 전환하는 한편, 한반도 신뢰프로세스가 실질적으로 가동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둘째, 이러한 점에서 이번 회담에서 비록 합의에 이르지 못하는 사항들이 있더라도 서로 합의하지 못한 것이 있다는 점에 합의(Agree to disagree)함으로써 추후 생산적 회담을 위한 쟁점을 명확히 하는 한편, 상대방의 표면적 주장보다 실제적 요구를 냉철하게 파악하는 데 주안점을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셋째, 또한 이번 회담에서는 북·미관계와 북한 핵문제 논의를 위한 양자 간, 다자 간 큰 협상 틀을 견인해냄으로써 협상국면을 확대해나가는 고려가 따라야 할 것이다.
넷째, 북한의 핵실험 강행 등으로 촉발된 대결국면을 마무리하고 국제적 핵협상 국면전환을 이끌어야 한다는 점에서 필요 의제를 반드시 다루되, 여러 회담 간의 위임범위 충돌문제를 고려하여 적절한 수준에서 적절한 회담으로 논의를 발전시키는 데 유의해야 할 것이다.
다섯째,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이산가족 상봉 등 이미 어느 정도 남북한 내부에서 공감대가 이루어진 부분들은 불필요한 전제 조건이나 과거에 연연하기보다 남북관계 전반의 새 국면을 열어 나간다는 차원에서 결단을 내리도록 남북 대표들이 서로 격려하길 바란다.
여섯째, ‘6·15 공동행사’ 문제는 양측 다 정치적 이슈로 몰고 가서는 안 된다. 얼마 남지 않은 기간 동안 실제로 준비할 수 있는 시간과 여건이 제약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6·15 행사’를 개최하는 것보다 ‘6·15 정신’을 확인하고 부활시키는 데 목표를 두어야 할 것이다.
형식보다는 실질을 우선해서 문제를 풀어 나간다면 누가 회담 대표가 되느냐 하는 문제와 구체적 의전과 행사진행에서 나타나는 양측의 이견은 회담의 결정적 장애가 되지 않을 것이다.
특히 이번 회담이 서울에서 개최되는 것도 가볍지 않은 의미가 있다. 북한 대표가 자연스럽게 청와대를 예방할 기회가 있다면, 과거 이명박 정부에서 북한 붕괴론이 얼비치는 압박과 모욕을 당했던 북한으로서는 박 대통령으로 부터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의 진정성을 직접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회담 개최를 준비하는 남북의 대표와 당국자들에게 큰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 이 글은 평화재단 현단진단 제77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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