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반도평화

정전 60년, 평화가 간절하긴 합니까?


북한은 장맛비 속에서도 소위 ‘전승절’(정전협정 체결일, 7월 27일) 행사에 역대 최대 규모의 군사퍼레이드를 펼치며 외신기자도 대거 초청했다고 한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전승기념관’ 공사현장을 7차례나 들러서 “전승기념관은 나라의 보물고, 반미대결장, 반미교양의 중요 교양거점”이라며 의미를 강조했다. 6·25 전사자들이 안치된 ‘인민군 열사묘’ 개축 공사도 마무리 단계에 있다고 한다.


한계에 달한 정전체제와 오리무중인 평화체제


북한은 동족상잔을 잠정적이나마 멈추었다는 것보다 미국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지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새로운 전쟁에 대비한 각오에 방점이 있는 셈이다.


우리 쪽의 분위기도 ‘오십보백보’다. 이 땅에 공고한 평화를 세우기 위한 각성은 드물고 6·25전쟁을 야기한 북한에 대한 증오와 경각심을 일깨우는 행사가 대부분이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 것인가? 공고한 평화체제는 고사하고 껍데기만 남은 위태한 정체체제를 우리 아이들에게 대물림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는 것인가?


돌이켜보면 정전협정 당시 우리는 온통 적대세력에 둘러싸여 있었다. 북한은 물론 중국도 우리와 교전상대였고 소련은 공산주의 종주국으로 적대 진영의 본산이었으며, 일본은 국권을 강탈해 민족분단의 뿌리를 만든 철천지원수였다. 그러나 우리는 지난 60년 동안 이들 적대세력과 모두 화해하고 선린관계를 만들어 냈다. 오직 북한만 예외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동안 민족과 언어, 문화가 다른 나라들과의 적대관계를 선린관계로 바꾸는 데 쏟았던 우리의 노력과 역량을 이제는 동족인 북한과의 적대관계 해소로 방향을 돌려야 한다. 그리하여 다음 세대에게 평화의 터전 위에 자유와 안전과 복리를 누리는 한반도를 물려주어야 한다는 다짐이 필요한 때이다. 이것이 정전 60년의 진정한 의미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한반도 평화문제를 지난 1970년대보다 오히려 덜 절박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휴전선과 해상에서 크고 작은 교전은 물론 무장간첩이 횡행하고 청와대가 기습을 받던 시절에는 남북 불가침협정이라든가 평화체제에 대한 간절함이 국민들 모두에게 절박했었다. 지금 절박함이 덜하다고 느끼는 것은 불안한 평화나마 두 세대 이상 지속되어 평화상태에 있다고 착각하거나 또는 현실에 안주하려는 경향 때문이다. 하지만, 그 근저에는 대북 힘의 우위에 대한 확신이 깔려 있다고 본다. 경제력에서 우리의 3%도 되지 않는 북한을 상대로 골치 아픈 협상보다는 간단하게 힘으로 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자신감이 은연중에 작용한 결과다.


그래서 지난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나 1994년 '미·북 제네바 기본합의', 그리고 2005년 ‘9·19 공동선언’ 등에서 적절한 시점에 다루기로 합의된 한반도 평화체제 문제에 대해 진지하고 본격적인 논의나 협상이 계속 지연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북한이 정전협정 폐기와 핵보유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위태로운 정전체제나마 북한의 도발을 견제하고 감시하는 정전기구들이 존재했으나 이마저도 작동 불능상태에 있다. 더구나 북한은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해 세 차례의 실험까지 마쳤다. 이제는 핵을 가진 북한을 계속 힘만으로 관리할 수 없게 되었으며, 북한 핵문제를 경제적 보상이나 경제적 제재로 해결해 보려던 시도도 다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동안 미루어 두었던 한반도 평화체제 카드를 본격적으로 진지하게 검토할 때가 되었다. 평화 문제를 정면에서 다룰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 박근혜 대통령 (좌측)과 북한의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연합뉴스)

 

한반도 평화체제와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박근혜 정부가 말하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의 최종 목표는 공고한 평화체제의 골격을 만드는 일과 연결되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조성된 남북 간 상호신뢰가 북한 핵문제 해결의 추동력이 되고 더 나아가 한반도 평화통일의 초석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여건은 매우 좋지 않다. 최악의 남북관계를 물려받은 박근혜 정부가 한반도 평화정착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안고는 있지만, 이명박 정부 시절에 남북대화의 동력을 잃어버린 탓에 남북관계의 안정적 관리라는 과제를 감당하기에도 벅찬 상황에 놓여 있다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여건에서 초기 6개월의 남북관계를 평가하기는 이르지만 박근혜 정부가 전정부로부터 물려받은 최악의 국면을 벗어나는 데는 일단 성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어느 쪽의 이니셔티브였던 간에 한반도 상황을 파국의 국면으로부터 긴장완화를 모색하는 국면으로 바꾸어 놓았다.


둘째, 아직 가시적인 진전은 없지만 판문점과 개성에서 남북회담이 꾸준히 시도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을 지속하는 것만으로도 6자회담 등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주변국들의 적극적 움직임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여전히 남북관계가 살얼음판이기는 하지만 정부가 북한 여자축구대표팀의 서울방문을 허용하고 북한이 임진강과 북한강 상류댐 수문 개방계획을 사전에 우리에게 통보하는 등 남북 간 교류협력의 재개로 비쳐지는 조치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아직 남북이 이명박 정부 시절로부터의 관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시간이 걸리겠지만 극단의 감정적 대응이나 과도한 원리주의적 이념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한반도 신뢰프로세스가 한반도 평화체제로 연결될 수 있다는 기대를 이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의 동력이 미더워 보이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자체에 대한 북한의 의심이 가시지 않고 있는 데다가 우리 국민들의 믿음도 충분히 보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어떤 면에서 이명박 정부의 부정적 유산은 실패한 남북관계보다는 국가안보나 대북정책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크게 약화시켰다는 데 있을 것이다.


대통령이 나서서 종북 논란을 스스로 키운 점, 천안함 사건을 대처함에 있어 안보책임의 본말을 희석시킨 점, NLL 문제를 국내정치에 끌어들여 국론분열을 야기한 점 등은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를 무너뜨린 주요한 계기로 되었다.


북한으로 하여금 그들 체제가 시대착오적이어서 국내외의 외면을 받고 있다는 점을 인식케 해야 할 정부가 오히려 대통령의 입을 통해 우리 내부의 종북세력이 우리 체제를 위협할 정도라고 겁을 준 것은 북한으로 하여금 상황을 오판하게 만드는 몰전략적(沒戰略的) 행태였다.


천안함 사건에 대한 정부의 대응도 마찬가지다. 북한의 기습에 당해 안보선이 뚫렸으면 해당부대는 물론 통수권자도 책임을 면하기 어렵지만 모든 책임을 북한으로 돌리고 희생된 장병을 국가유공자로 대우하는 것으로 끝내려 했다. 그 결과 앞으로 또다시 당해도 그것이 북한의 소행이라는 것만 증명하면 된다는 그릇된 인식을 심어주었다. 최근 북한이 연루된 해킹사건 처리와 관련해서도 이런 모습들이 재연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최근의 북방한계선(NLL) 논란이나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의 공개 사태는 현 정부의 안보의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 참담한 느낌까지 든다. 정상회담 회의록을 일정 기간 비밀로 해두는 이유는 대통령이 국민들을 의식하지 않고 마음 놓고 얘기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회담에서는 중국과 미국 등 주변국들에 대한 남북정상의 솔직한 의견도 개진된다. 제3국 정부가 알아서는 곤란한 예민한 문제들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국익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다른 나라의 정상회담도 그러한 전략적 고려 때문에 비밀 유지를 철칙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북방한계선 포기 논란과 관련해서는 노무현 대통령이 어떤 수사를 동원해 발언을 했더라도 후속 정부는 “그것을 북방한계선의 포기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단호하고 명백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 정도다. 그런데 오히려 정부가 나서서 북한의 해석을 대신 주장하는 셈이니 한심할 지경이다. 과거 ‘7·4공동성명’에서 통일의 원칙으로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에 합의했지만 역대 우리 정부는 안보를 해하는 북한의 어떤 해석도 일축해 오고 있다. 이번 북방한계선 논란은 북한 앞에서 공개적으로 벌이는 자중지난이며, 두고두고 후환이 될 뿐이다. 박근혜 정부는 이명박 정부 시절부터 계속되는 이 같은 혼란상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국민대통합과 박근혜 대통령의 리더십


남북관계가 좀처럼 풀리지 않고 있는 가운데 종교계를 포함한 정·재계 등 각계 지도층 인사 66명이 지난 6월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민통합 선언문’을 발표하고 한반도 신뢰회복을 촉구했다.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우리 사회 지도층 인사들은 선언문을 통해 “북한은 민족공동체를 함께 이뤄가야 할 협력의 상대”라면서 “북한 정부를 무조건 붕괴시킨다거나 무조건 포용해야 한다는 양 극단의 사고는 지양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 선언문은 박정희 정부의 ‘7·4공동성명’, 노태우 정부의 ‘남북기본합의서’, 김대중 정부의 ‘6·15 공동선언’, 노무현 정부의 ‘10·4선언’ 등 남북합의 정신과 노력을 남북관계의 축으로 삼아 한반도 긴장 완화와 평화 정착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인도주의 차원에서의 대북지원은 정치 상황과 관계없이 추진하며, 한반도 비핵화와 북한인권 문제도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라는 인식이 국민적 공감대가 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합의를 통해 소모적 남남갈등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남북관계도 신뢰의 토대 위에서 평화통일로 나아가는 동력을 얻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 선언문은 이달 2일 국회에 국민청원으로 제출되어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민통합 결의안’ 형식으로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되었다. 이는 정전협정 60년을 맞아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염원하는 국민들의 뜻과 의지를 결집시킨 표상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남북관계는 안개 속에 묻혀 있고 우리 내부의 대북정책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국민대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때이다. 분란의 장본인들을 가려 읍참마속을 단행하고 모두 제자리에 돌아가 국정의 정상운영을 위한 새로운 기운을 모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과거처럼 대통령이 대북정책을 둘러싼 우리 내부의 갈등에서 한쪽 모서리에 서서 혼란을 부추겨서도 안 되지만, 안보와 대북문제와 관련된 논란이 밑도 끝도 없이 미궁으로 빠져 시시비비도 못 가리는 난장판이 되도록 방치해서도 안 된다.


대통령은 특정한 정파의 이해관계를 떠나 국익과 남북관계의 미래를 위해 우리 사회가 신뢰상실의 위험계선을 넘지 않도록 단호하게 선을 그어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앞으로 열릴 남북대화의 자리에서 북한이 우리와 함께 평화에 대한 간절함을 나눌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이 글은 평화재단 현안진단 제80호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