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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100회 강연

[법륜스님 세계 100강 제11강] 상트페테르부르크 "이기적인 동료에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안녕하세요. 법륜 스님의 세계 100회 강연 중 13번째 강연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렸습니다.  


모스크바를 출발하여 기차 안에서 하룻밤을 자고 아침 7시55분에 상트페트르부르크에 도착했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한때 레닌그라드라고 널리 알려진 도시입니다. 네바 강과 운하가 도시를 둘러싸고 있어 러시아의 베네치아라고도 불리는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즉문즉설 강연을 시작하기에 앞서 프랑스의 몽테랑이라는 건축가가 일생을 바쳐 40년 동안 건축했다는 이삭 대성당에 들러 보았습니다.



▲ 이삭 대성당


도시의 실루엣 위로 불쑥 솟아 있는 황금빛 돔모양 지붕이 인상적인 성당인데, 262개의 계단을 따라 돔 지붕에 올라가니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멋진 시내 전경을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 돔 위에서 내려다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풍경  


세계 3대 미술관 중에 하나인 에르타미주 미술관이 들어서 있는 드보르초야 플로샤트 ‘궁전 광장’ 앞을 걸으며 주 상트페테르부르크 노성준 한인회장님께 이곳의 교민 상황에 대해 자세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현재 1,200명 정도의 교민이 살고 있는데, 대부분 주재원이거나 선교사들이 많다고 합니다. 유학생은 100여명 정도 되는데, 최근 물가가 많이 오르면서 생활이 어려워지고, 특히 학제가 5년제가 많아서 한국과 사이클이 맞지 않아 유학 오는 것을 많이 꺼려하는 편이라고 합니다. 현대자동차 공장이 들어와서 30가정 정도가 살고 있고, 대부분 교회를 다니는 분들이 많아서 시내에만 10개의 한국 교회가 운영되고 있다고 합니다. 


즉문즉설 강연은 오후 4시에 상트페테르부르크 한인 장로교회에서 열렸습니다. 오늘은 교회의 십자가 앞에서 법륜 스님이 강연을 합니다. 총 77명이 참석하여 열띤 분위기 속에서 3시간 넘게 강의가 이뤄졌습니다. 



▲ 상트페테르부르크 한인 장로교회 


총 7명이 질문을 했는데 주로 한국 대기업에서 주재원으로 나온 분들의 질문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 회사 동료의 이기적인 행동으로 고민하는 분의 질문과 법륜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 


- 질문자 : “회사 내에서 이기적인 행동으로 주위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언쟁을 하면서 풀어가야 할지 고민인데, 어떻게 풀어가야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공공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물건은 나 몰라라 하면서 자기 물건은 굉장히 챙기거나, 택시를 함께 타도 자기는 현금이 없다면서 쏙 빠지거나, 상대를 무시하는 말을 자주 합니다. 이 친구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 법륜 스님 : “충분히 그렇게 느낄 수 있겠다 싶지만 질문이 좀 막연합니다. 4명이 술을 마시고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술값을 내기로 했는데 자기 차례가 되었는데도 술값을 안내면 이기적이라고 말할 수는 있겠죠. 그런데 자기 순번에 돈을 안 낸 그 사람이나, 친구가 술값 한번 안내었다고 이기적이라고 말하는 질문자나,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친구라면 술값 한번 못 낼 수도 있지요. 술값 한번 안냈다고 저 사람은 이기주의라고 말하는 질문자 또한 이기주의가 아닐까요? 



그 사람은 자기가 이기주의자인지를 잘 몰라요. 그게 문제이지요. 그분은 자신이 이기주의자라고 자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어릴 때부터 삶의 습관이 그런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국에는 지금 중국에 살던 조선족들이 많이 들어와서 살고 있습니다. 초기에는 갈등이 굉장히 심했습니다. 한국에 들어와 살던 조선족들의 신원을 조사해보면 대부분 중국에서 굉장히 교육도 많이 받고 괜찮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중국에서 선생님 했다고 한국에서도 선생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식당에서 서빙을 하던지 공사장에 가서 노가다를 하던지 허드렛일을 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막노동 하는 사람들이 쓰는 언어의 절반이 욕설입니다. 욕설과 반말이 하나의 자연스런 문화입니다. 그런데 중국에서 한국에 들어와 일하는 사람들은 이런 말투를 자기가 조선족이라 무시해서 반말하고 욕설한다 이렇게 오해합니다. 이런 감정들을 못 견뎌서 여러 가지 갈등이 생겨나곤 했습니다.  


그처럼 질문자가 볼 때는 무시를 당했다고 느끼는데, 무시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냥 그 사람의 일상생활이었을 뿐입니다. 그 친구가 살아온 삶이나 가정환경을 조사해 보면, 자기도 모르게 그런 삶의 습관과 문화 속에서 아마 살았을 거예요. 외국인을 만났을 때 그 문화를 이해하듯이 ‘저 친구는 저런 습관이 있구나, 저런 문화가 있구나, 저런 버릇이 있구나’ 이렇게 이해를 하면 내가 화가 안 나는데, ‘저 자식 또 봐라, 술값 안 낸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됩니다. 



미워한다는 것은 질문자가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버릇을 고쳐주어야 하느냐? 못 고칩니다. 부모도 못 고치는 걸 질문자가 어떻게 고쳐요? 상사도 부하를 못 고치는데 동료인 질문자가 어떻게 고쳐요? 못 고칩니다. 그래서 고칠 생각을 하시면 안 됩니다. 그냥 놔두고 이해하는 겁니다. 고치려고 하면 질문자가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안 고쳐지기 때문입니다. 


둘째, 내가 기분 나빠서가 아니라 그 사람도 그것을 고치면 그 사람의 미래를 위해서 좋겠지요? 미워해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저 사람을 위해서 고치도록 깨우쳐 주겠다 이런 마음을 내는 것은 좋습니다. 그럴 때는 그것이 쉬이 안 고쳐지는 것을 알고 조언을 해야 해요. 쉬이 안 고쳐지는 것을 알고 조언을 하면 그 사람이 안 고쳤을 때 내가 기분이 안 나쁩니다. 그리고 쉽게 못 고칠 줄 알기 때문에 꾸준히 얘기를 해줄 수 있어요. 


그런데 한 두마디 한다고 그 사람이 고칠 것이라고 지나친 기대를 하게 되면 안 고치면 기분이 나빠집니다. 다음에는 그냥 무시해버릴까 포기하는 생각이 듭니다. 포기해도 인생의 길이 아니고, 지나친 간섭을 해도 인생의 길이 아닙니다. 꾸준히 지적을 해줘야 합니다. ‘저걸 고치면 저 사람에게 좋다. 그러나 고치기 어렵다’ 는 두 가지 명제만 생각하면 저 사람을 위해서는 지적을 해주되 고치기 어려운 줄을 내가 이해하기 때문에 고칠 것이라고 쉬이 기대를 안 하게 되면 못 고쳐도 내가 스트레스를 안 받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안 고칠 바에야 뭐하러 문제 제기 하느냐’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 그러면 사랑이 없는 겁니다. 그 다음에 문제제기 하면 꼭 고칠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미워하지 않고 사랑으로 하면 꾸준히 할 수 있고, 미워해서 하면 바짝 하다가 안 되면 포기해 버립니다. 성인의 말씀은 내가 굉장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행복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화가 나서 하게 되면 짧은 순간에 파워는 있는데 그게 뜻대로 안되면 스트레스를 받고 포기하게 되어 버려요. 그런데 그 사람을 위해서 얘기하게 되면 꾸준히 문제 제기를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한번 접근해 보면 좋겠다 싶어요. 


물론 쉽지 않아요. 그 사람이 자신을 고치는 것이 쉽지 않듯이 나도 그렇게 되기가 쉽지 않아요. 오늘 스님 법문 듣고 나도 한번 해봐야지 하지만 자기도 그렇게 잘 안될 거예요. 안 되는 나를 보면 저 친구도 고치는 게 쉽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안되지만 나도 꾸준히 해보듯이 저 친구도 안 되지만 개선을 꾸준히 하도록 내가 도움을 줘야겠다 이런 관점을 가지면 좀 나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