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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스님 즉문즉설

자원봉사 10년, 행복하지 못했던 이유 깨닫다

 

 

나는 매주 목요일 저녁 7시30분에 서울 서초동 정토회관에서 열리는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강의를 듣는다. 지난주에도 그랬다. 강연이 끝나고 나오는데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어느 보살님이 나를 붙잡았다. ‘법륜스님의 금강경 책’이 너무 좋아서 주위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보시를 하고 있다며 나에게도 책 한권을 덥석 건넸다. ‘법륜스님’ 하면 즉문즉설로 유명한데, ‘금강경’이라니... 작년 한해 즉문즉설 300회 강연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고민과 갈등을 치유해 온 법륜스님의 깊이를 경험해 본 바가 있기에 아무런 거부감 없이 책을 받아들었다. 첫 장을 열자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정말로 금강경을 읽고 이해하고 받아들였다면 금강경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나의 모습은 변해 있을 것입니다. (p7)

 

마침 나는 변화를 갈구하고 있었다. 세상을 변화시켜보겠다고 발심을 해서 자원봉사를 시작했고 벌써 10년이 흘렀다. 자원봉사를 한 만큼 나는 행복해져야 하는데, 그렇게 마냥 행복하지 만은 않은 지금의 현실이 씁쓸했다. 돌파구를 찾는 마음으로 책을 읽어 내려갔다.

 

법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무릇 상이 있는 바는 다 허망하니 만일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본다면 여래를 보리라. (p95)

 

금강경 제5분에 나오는 구절이다. 초심자가 얼핏 보면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는 표현이다. 하지만 아주 자세하고 친절하게 법륜스님은 당신의 경험을 예로 들어가며 설명해주었다. 마치 금강경에서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자비롭게 설명해주듯이 말이다. 일예로 책 속에는 이런 얘기가 나온다. 성추행을 당했던 마음의 상처 때문에 집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려 하지 않고 하루 종일 방 안에만 웅크리고 있는 아가씨가 있었다. 성추행으로 자기 몸이 더러워졌다고 괴로워했는데, 법륜스님은 이렇게 말한다. 

 

남자가 내 몸에 손을 대는 순간 일어난 사건은, 내가 내 몸이 더럽혀졌다는 한 생각을 일으켰다는 것, 그것 하나뿐입니다. 그러니 ‘더러워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더러워졌다는 한 생각에 사로잡혀 그 오랜 시간을 꿈속에서 살았구나!’ 그렇게 탁 깨달으면 이제까지 지고 있던 무거운 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집니다. (p406)

 

이는 성추행한 남자가 죄가 없다거나 그에게 죄값을 묻지 말아야 한다거나, 그를 처벌하는 일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성범죄자에 대한 처벌은 법대로 엄중하게 처리해야 한다. 법륜스님이 금강경을 통해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이 괴로움을 여의어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제법이 공함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한없이 무거웠던 등짐도 눈을 뜬 뒤에는 조금도 나를 힘들게 하지 못합니다. 아니, 그 짐은 본래 짐이 아니었음을 보게 됩니다. 학벌이 낮다, 병이 들었다, 이혼을 했다, 자식이 없다, 아기를 못 낳는다, 사업에 실패했다, 실직을 했다, 어떤 일도 다 그렇습니다. 눈곱만큼도 나를 괴롭힐 수 없고, 눈곱만큼도 나를 더럽힐 수 없고, 눈곱만큼도 나의 가치를 떨어뜨릴 수 없습니다. (p408)

 

모든 상에는 고정된 실체가 없으므로 상에 대한 집착을 버릴 때 비로소 세상의 참모습을 보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 내용은 법륜스님의 많은 경험담과 함께 흥미롭게 반복된다. 경전 강의라고는 하지만 마지막 장까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이유다.

 

평소 절에 가면 쉽게 볼 수 있었던 금강경은 한자로 된 아주 어렵고 투박한 용어들뿐이었다. 특히 금강경에는 ‘상을 여의다’ 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 예전부터 도대체 이 ‘상’이란 무엇인지 궁금했었다. 법륜스님의 설명을 통해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상이란 나다-너다, 깨끗하다-더럽다, 좋다-나쁘다 등등 마음에서 일으켜 모양 지은 관념을 말합니다. 상을 여읜다는 것은 세상 만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말입니다. 나와 다른 삶의 방식, 나와 다른 의견과 주장, 나와 다른 종교와 신앙, 나와 다른 사랑의 방식도 모두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상을 여읜 것입니다. (p67)

 

우리는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본다는 설명이다. 안경을 벗어야만 그때까지 안경을 끼고 살았음을 알게 된다. 상에 집착했을 때 ‘내가 지금 상에 집착하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것이 바로 상이 상 아닌 줄 아는 것이다. 참 쉽고 명쾌했다.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그 문답의 기준은 바로 금강경!

 

‘즉문즉설’을 통해 대중들의 생활 속 고민을 해결해주었듯이 구체적인 상담 사례들이 곳곳에서 나온다. 자세히 읽어보면 ‘즉문즉설, 그 문답의 기준은 바로 금강경에 있었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

 

가령 이런 상담 사례가 있었다고 한다. 시장바닥을 헤메면서 억척스럽게 살아서 두 아들을 국비장학생으로 미국 유학을 보내고, 아들을 따라 미국 땅에 살게 된 할머니가 있었다. 미국 땅에 와보니 말도 통하지 않고 사는 풍속까지 눈에 거슬려서 답답하고 견디기 어려웠다. 자식들이 출근하고 나면 텅 빈 집안에 혼자 남아 감옥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자식들은 어머니의 역정을 괜한 것이라고만 여겼다. 급기야 아들들에게도 서운한 마음이 생기고 ‘저놈들이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가!’ 하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고 한다. 그러자 법륜스님은 이렇게 말해줬다.

 

“영 자식이 미우면 차라리 ‘저놈의 자식, 남이다’라고 생각하세요. 왜냐하면 나랑 아무 상관도 없는 남은 우리가 원망하고 미워하지 않잖아요.” (p89)

 

이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 기도하던 할머니는 크게 깨닫는다. 아들이 남으로 다가온 순간 눈물이 솟구쳤다. 그토록 집착하던 아들이 완전히 남으로 보이기 시작하자 원망과 미움이 씻은 듯이 사라진 것이다. 그러자 먹여주고 입혀주며 용돈까지 주는 사람에게 고마운 마음이 밀려왔다고 한다. 환경은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었지만 그때부터 할머니는 절에서 봉사하며 행복한 나날을 살게 되었다. 법륜스님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기쁨의 눈물을 함께 흘렸다고 한다. 

 

응무소주 이생기심.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p185)

 

이 구절은 금강경의 핵심을 담고 있다는 사구게다. 위의 할머니 이야기를 통해 이 사구게가 담고 있는 뜻이 명쾌하게 드러난다.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즉 상대에게 바라는 마음이 곧 나에게 큰 괴로움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법륜스님은 이렇게 강조한다.

 

길가는 사람이나 이웃하고는 싸우지 않으면서 사랑하는 가족하고는 허구헌날 싸웁니다. 이 역시 가까운 사람에게는 ‘나한테 이만큼은 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와 가까울수록 그에게 바라는 수위는 높아지고 그것이 충족되지 않을 때 괴로워합니다. 그러니 내가 답답하고 괴로운 이유는 그 사람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 무언가를 바라는 내 마음 때문입니다. 


바라는 마음이 아니라 도와주겠다는 마음을 내면, 내는 그만큼 내 괴로움이 줄어듭니다. 이렇게 내 가족, 내 친구, 내 이웃을 돕겠다는 마음이 점점 커지면, 그것이 바로 ‘일체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마음입니다. 일체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마음을 내면 괴로움은 사라집니다. (p299)

 

책의 마지막으로 갈수록 의미는 더욱 분명해지고, 헷갈려하던 부분은 뒷부분에서 다시 다른 비유와 사례로 또 한 번 강조해줘서 다시 명료해지는 순간들이 반복되었다.

 

법륜스님대중들에게 금강경 강의를 하고 있는 법륜스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내 마음은 평온함이 가득했다. 그동안 남들을 돕겠다는 자원봉사를 10년이나 했으면서도 정작 나 자신은 왜 힘들어했는지 몰랐다. 이제 비로소 알았다. 

 

자원봉사 10, 행복하지 못했던 이유 깨닫다

 

자원봉사를 했기 때문에 월급이나 명예나 권력을 바라는 건 아니었지만, 늘 활동을 하면서도 내가 이렇게 고생했으니 그걸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밑마음이 항상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좋은 일을 마음껏 하고서도 돌아서서는 나에게 남은 건 무엇일까 회의했던 것이다. 봉사를 하면서도 뭔가 작은 인정이라도 받아보려고 아등바등 했던 내 모습이 돌아봐졌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하더라도 이 ‘바라는 마음’ 없이 행할 때 진정으로 나 자신도 행복할 수 있구나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남을 열심히 도왔지만, 실로 남을 도운 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다만 필요한 일을 행했을 뿐. ‘나’, ‘내 것’. ‘내 생각’ 이라는 꼬리표만 내려놓으면 세상 모든 일이 다 나의 일이 되는 것이다. 거기에는 '도와줬다'는 생각이 일어날 여지가 없다. 무슨 일이든지 인연을 따라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참으로 인생의 주인이 되라는 말씀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갈등을 빚었던 원인도 내가 상대에 대해 늘 기대를 높게 가져놓고선 거기에 충족되지 않으면 화를 내고 마음에 안 들어 했던 것이었다. 상대에게 문제가 있다고 여겨왔는데, 이런 내 마음으로 인해 생긴 괴로움이었구나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남을 이해하는 것은 그를 위한 일인 것 같지만 사실은 나 자신에게 가장 큰 이익이 되는 것이었다. 남을 미워하는 것은 그를 해치는 일인 것 같지만 미워하는 마음으로 괴로운 사람은 나 자신이고 결국 나에게 더 큰 해악이 되는 것이었다. 법륜스님은 이런 내용들을 마지막에 다시 한 번 명쾌하게 정리해 주었다.

 

일체중생을 다 제도해 마쳤다 하더라도 ‘내가 중생을 제도했다’는 생각이 없어야 합니다.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내가 너를 제도했다는 생각이 있으면 어떤 형태로든 보상을 바라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것 또한 바라는 마음이므로 그런 마음으로는 괴로움과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일체중생을 제도하겠다고 마음을 내되, 그 마음마저도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p301)

 

금강경의 표현들은 어떻게 보면 참 난해하다. 긍정이 부정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부정에서 긍정으로 변하는가 하면, 이것도 아니면서 동시에 저것도 아니라는 식이다.

 

하지만 법륜스님의 해설을 읽고 나면 명쾌해진다. 금강경은 생각이 그 어느 쪽으로도 고정되지 않게 하면서, 언어로는 도저히 전달할 수 없는 살아 있는 깨달음을 듣는 이 스스로 체득하도록 하기 위해 말 아닌 말, 말을 넘어서는 말로써 언어적 한계를 뛰어넘고 있음을...

 

또한 깨닫는다.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의 힘이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구나. 우리가 괴로움 속에 허덕이는 이유는 문제의 원인이 상대에게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구나. 금강경을 깊이 이해하면 모든 괴로움은 다 내가 일으킨 ‘상’으로 의해 생겨난 것임을 명료하게 알게 된다. 즉문즉설에서 법륜스님의 답변도 언제나 자기를 돌아보게 하는 것이었다. 상대에게 ‘바라는 마음’이 늘 나를 괴롭게 했던 것이다. 그래서 금강경은 말하는 것이다.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고.

 

덧붙이는 글 | 금강경을 더 깊이 이해하려면 ‘부처님의 삶’ 알아야 한다. 부처님이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알게 되면 ‘금강경’의 행간에 숨어 있는 참뜻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부처님의 일생을 다룬 책 ‘인간 붓다 – 그 위대한 삶과 사상’을 함께 읽기를 권한다.

 

<금강경> 지은이 법륜, 정토출판 펴냄, 2012년 11월, 551쪽, 2만4000원

<인간붓다> 지은이 법륜, 정토출판 펴냄, 2012년 6월, 575쪽, 1만4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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