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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평화

한미FTA, 미국 일변도 외교가 갖는 함정

어제 블로그 포스팅에서 한미 FTA 이행법안이 주권훼손 요소가 있다고 말했었습니다. 우리의 필요성뿐만 아니라 미국의 국가전략에도 부합하는 것이기 때문에 굳이 한․미동맹 강화라는 안보논리를 내세워 서둘러가면서 일방적으로 우리만 양보할 필요가 없는 사안이라고 말이죠. 한·미 FTA로 경제적인 큰 수혜가 따른다고 해도, 냉전시대도 아닌 오늘날 우리의 주권을 제약당하면서까지 불평등협정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무래도 다시 생각해야 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이 미국과 한․미 FTA를 체결하려 하는 데는 또 다른 의도가 있는 것 같습니다.  

△ 미국에 유리한 한․미 FTA 협정의 법적 지위 때문인지 이 대통령의 미 의회 연설은 45차례나 박수를 받았습니다. 뒤에서 기립박수를 치며 썩소를 날리는 표정과 이 대통령의 환한 미소가 마냥 불편하게만 느껴졌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미국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미 FTA가 양국의 일자리 창출을 위해 중요하지만, 이 지역에서 미국의 재관여(reengagement) 메시지를 알리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고 그 의의를 말했습니다. 이러한 인식은 이 대통령의 미 의회 연설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동북아시아의 경제적 활력이 지정학적 변동과 함께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세력균형에도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면서 미국의 적극적인 역할을 주문했습니다.

한미동맹은 결국 중국 견제용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 대통령은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아시아 국가들이 상당히 중국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중국을 견제하기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며, “이 대통령은 미국에 중국과 협력하면서도 중국의 부상에 대처할 균형자로서의 역할을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과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발표한 언론보도문에도 다음과 같은 비슷한 취지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한․미동맹이 한국에는 ‘안보의 제1축’이며 미국에는 ‘태평양지역 안보를 위한 린치핀(the lynch-pin for security in the Pacific region)’임을 재확인하고, 앞으로도 평화와 번영을 위한 태평양 파트너십(Pacific Partnership for Peace and Prosperity)을 더욱 공고히 해나가기로 했다.”

우리 정부는 워싱턴포스트의 보도가 논란이 되자 이 대통령의 진의가 잘못 전달됐다고 진화에 나섰습니다. 이처럼 외국 언론의 기사에 대해 우리 정부가 나서 사실관계를 부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일본의 월간지 『문예춘추』 2010년 9월호가 이명박 대통령이 오바마 미 대통령에게 후텐마 미 공군기지를 한국으로 이전하라고 제안했다고 보도했을 때도 청와대는 즉각 사실무근이며 완전한 소설이라고 부인한 바 있습니다.

우리 정부는 이명박 정부에 들어와 한․미동맹이 전략동맹으로 한 단계 발전했다고 자랑해 왔습니다. 미국도 오바마 대통령이 2010년 6월 토론토 한․미 정상회담에서 언급한 것을 계기로 한․미관계를 가리킬 때 ‘린치핀’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오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에도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이 “한국과 미국의 동맹은 안정과 안보의 린치핀”이라고 밝힌 바 있지요. 이번 한․미 정상회담의 언론보도문에도 이 단어가 들어가 있습니다.

린치핀은 ‘자동차의 바퀴가 빠지지 않도록 축에 꽂는 핀’에서 나온 말로 핵심이나 구심점을 의미한다. 이 말 그대로 한․미관계가 지난 정부들 때보다 훨씬 중요하고 좋아졌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냉전시기 동서 양대 진영이 적대적일 때도 사용하지 않던 단어를 탈냉전 시기, 특히 중국의 부상이 현실화된 이 시점에서 사용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국 일변도 외교가 과연 우리의 국익에 도움이 됐는가요?

현 정부에 들어와 한․미관계가 역대 어느 정부보다도 좋아 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이명박 대통령과 부시, 오바마로 이어지는 미국 대통령들과의 개인적인 신뢰가 크게 작용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 한․미관계를 양국 대통령의 개인적 신뢰 문제로 보는 것은 지극히 표피적인 평가입니다. 미국 대통령과 한국 대통령이 갑자기 개인적으로 친해질 이유는 없습니다. 사실은 두 대통령의 개인적 친분과 신뢰 때문에 한․미관계가 좋은 게 아니라, 거꾸로 양국관계를 좋게 하여 국익을 증진하려는 양국의 전략적 의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인 것입니다. 전임 부시 대통령이 대통령 시절 일본 자민당 출신의 고이즈미 총리와 개인적인 친분을 과시했던 것은 그가 미국의 대중국 봉쇄정책에 적극 협조했기 때문이지, 어떤 개인적 취향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양국 대통령이 친해져서 우리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굳이 이를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문제는 이명박 정부에 들어와 가속화되고 있는 대미 일변도 외교가 과연 우리의 국익에 도움이 됐는가 하는 점입니다. 안보 면에서 볼 때, 북한의 2차 핵실험 이후 미국은 한국에 확장억제력 제공을 약속했고 지난해 천안함, 연평도 사태 이후에는 연합해상훈련을 통해 대북 억제력을 과시하는 등 우리에게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한․미관계에서 미국이 언제나 우리 편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최근 미국이 동해 표기를 일본해로 단독 표기해야 한다는 공식의견을 국제수로기구(IHO)에 제출했고, 이 기구는 이를 자체 홈페이지에 게시했다는 사실이 지난 8월 초에 알려졌습니다. 이번 일본해 표기의 제출에 대해 미국 정부는 해당기구의 의견에 따른 것으로 미국 정부가 관여하지 않았다고 변명하지만 과거의 사례로 볼 때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2008년 7월 미국 지명위원회(BGN)가 독도에 대한 영유권 표기를 ‘한국(South Korea)’, 또는 ‘공해(Oceans)’로 되어 있던 것을 ‘주권 미지정지역(Undesignated Sovereignty)’으로 표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한국 내 반발여론이 거세지자, 8월 초 방한을 앞둔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은 분규가 발생하기 이전으로 표기를 원상회복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어째서 한․미동맹이 최고조에 있다는 이명박 정부에서 미국 정부는 잇달아 우리 국민의 정서와 외교부의 노력에 반하는 결정을 내린 것일까요? 2008년에 독도 영유권 표기는 원상회복시켰으면서, 왜 동해 표기에 대해서는 미 정부 산하기구의 입장일 뿐이라며 끝까지 태도를 바꾸지 않는 것일까요?

2008년 당시 부시 대통령이 독도의 영유권 표기를 원상회복하라고 지시하자, 청와대 이동관 대변인은 이에 대해 ‘한․미동맹 복원과 신뢰회복의 결과’, ‘대일 외교전의 승리’라고 자화자찬했었습니다. 당시 전문가들은 독도문제를 지나치게 미국의 판단에 의존하는 것은 위험하다며 “만약 미국이 일본 편을 들 경우 우리 정부는 주권을 포기하고 이를 받아들일 것인가.”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현 한․미관계가 역대 최고라면서 왜 정부는 지난번처럼 오바마 대통령의 번복조치를 얻어내지 못하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변국들과 다함께 잘 지내는 다이내믹한 외교가 필요합니다

우리 정부의 전략은 한․미동맹을 튼튼히 하여 지정학적 위험요인을 제거한 뒤에, 중국과의 경제적 통상관계를 확대해 나가겠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전략에 입각해 있기 때문에 한․미 FTA조차 대중국 견제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략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가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가운데에 끼여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지만 한․미 FTA가 우리 국익에 유리하기 때문이 아니라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따라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면 이는 올바르지 않습니다.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냉전시대에서 대륙세력은 중국․소련과 같은 사회주의국가, 해양세력은 미국․일본과 같은 자유민주주의국가였습니다. 하지만 냉전이 끝난 오늘날 중국과 러시아도 시장경제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 설정된 ‘진영’은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만약 현재의 좋은 한․미관계가 ‘진영외교’의 관점에 서 있는 것이라면 중장기적으로 볼 때 오히려 한국의 외교전략에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근년에 들어 전통적인 한반도 지정학의 성격도 변화하고 있습니다. 특히 정보화․세계화가 진행되고 동북아 경제가 통합으로 나아가는 오늘날의 추세 속에서 전통적인 한반도 지정학의 의미는 지경학으로 비중이 옮겨가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두만강과 압록강 양 국경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중국이 국제공동개발사업을 활발히 추진하고 있고, 김정일 위원장의 러시아 방문에 이은 이명박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예정)으로 남․북․러 가스 및 철도 연결사업 구상이 활기를 띠고 있습니다. 이제 한반도는 우리가 하기에 따라서는 강대국 간 각축장에서 벗어나 지경학적 중요성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미․중관계도 변화하고 있습니다. 현재 미․중관계는 ‘다투되 판을 깨지 않는다(鬪而不破)’는 말로 묘사되듯이 경제적 상호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때로 갈등하면서도 결코 양국관계의 기본 틀은 깨지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지난해에 한반도의 군사적 위기, 동중국해에서의 중·일 마찰, 남중국해를 둘러싼 중국과 주변국들과의 갈등이 발생하자, 올해 1월 19일 미․중 정상이 만나 모든 갈등과 분쟁을 평화적으로 대화를 통해 해결해 나가기로 합의한 데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밖에도 양국 장관급의 미․중 전략 및 경제대화(S&ED)를 통해 양국 및 국제적인 안보․경제 현안에 대해 지속적으로 협의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변화하는 한반도의 국제환경에서 우리 외교는 전통적인 동맹외교의 제한된 틀을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전통적인 지정학적 관점에 얽매어 미국과의 동맹에만 매달리기보다는 해양세력과 대륙세력 사이에서 가교역할을 통해 지경학적 이점을 극대화한다는 새로운 외교전략을 수립해야 합니다. 북한의 위협과 주변강대국들의 잠재적 위협이 상존하는 현실에서 평화를 확보하고 통일을 안정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세계 최강국인 미국과의 동맹은 필요불가결합니다. 하지만 냉전시기와 달리 한․미동맹은 상호존중과 호혜적 바탕 위에 서 있어야 더욱 건강한 관계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당분간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가 유지되겠지만 현재와 같은 추세로 중국의 부상이 지속된다면 머지않은 장래에 세계질서가 크게 바뀔 가능성이 있습니다. 적어도 동아시아 질서는 이미 재편과정에 들어섰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국외교의 글로벌화이지 한․미동맹의 글로벌화가 아닙니다. 더군다나 우리나라는 북한을 상대로 통일이라는 역사적 과업을 추구해야 한다는 점에서 주변국들과 다함께 잘 지내는 보다 다이내믹한 외교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미국의 점진적 쇠락과 중국의 급부상이라는 역사적 현실을 직시하여 더 넓고 길게 멀리 보고 우리의 외교전략을 재정립해야 합니다. (이 글은 평화재단 현안진단 제36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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