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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100회 강연

[법륜스님 세계100강 제35강] 버팔로 "이기심과 이타심의 경계가 모호합니다"

안녕하세요. 전 세계 100여개 도시에서 만난 사람들이 묻는 인생에 관한 질문과 법륜 스님의 답변! 오늘도 시작해 봅니다.  


법륜 스님의 세계 100회 강연 중 35번째 강연이 미국 뉴욕주의 버팔로에서 열렸습니다. 미국으로 넘어가기 전에 차에서 내려 미국쪽 나이아가라 폭포와 캐나다쪽 나이아가라 폭포를 잠깐 보고 국경을 넘어 버팔로 시로 들어왔습니다. 



나이아가라 폭포를 기준으로 동북부에는 온이타리오 호수가 있고 서남부에는 이리호가 있는데 이둘은 규모도 거의 비슷한것 같습니다. 국경을 넘어 버팔로 시로 들어오니 이리호가 시작되는지 오른쪽편으로 호수가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버팔로 시내로 들어와서 한국식당을 찾아서 점심식사를 하러 갔습니다. 입구에 스님의 버팔로 강연 포스터가 문 앞에 붙어 있어 더 반가웠습니다. 식사를 하고 계산을 하고자 하였더니 사장님이 “스님 식사는 공양으로 올리는 것입니다”고 하면서 식사비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장님은 저녁에도 성당으로 스님 강연을 들으러 갈 것이라며 저녁에 뵙겠다고 인사를 하였습니다. 점심 식사 후 오후 2시에 오늘 강연이 열리는 버팔로 성김대건 성당에 도착하였습니다.



<버팔로 성김대건 성당>


버팔로는 이리호에 면하여 화학공업이 발달한 도시였으나 이리호 인근 도시인 디트로이트, 클리버랜드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 화학공업이 쇠퇴하면서 도시가 점점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곳 입니다. 그래도 근처에 나이아가라 폭포가 있어서 관광사업을 하고 있으나 캐나다 쪽 보다는 훨씬 뒤쳐져 있는 느낌입니다. SUNY Buffalo(State University of New York at Buffalo, 뉴욕주립버팔로대학교)가 있어서 한국 유학생 약 700명을 포함하면 전체 버팔로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약 1,500명~2,000명을 예상한다고 합니다. 


스님은 몸상태도 좋지 않고 목소리도 많이 가라앉아 있었는데 사전 미팅때부터 목소리가 갈라지기 시작해서 행사를 시작하자 목소리가 더 안좋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정성을 다해 질문에 답해 주었습니다. 



오늘 강연에는 총 11명이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 중에서 이기심과 이타심의 차이에 대해 질문한 내용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 무엇이 진정으로 남을 돕는 길인지 성찰해 볼 수 있는 명쾌한 답변이었습니다. 


- 질문자 : “이기심과 이타심이 헷갈립니다. 내가 조금 불편하더라도 봉사는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길이고, 불편하더라도 내가 괴롭지 않으면 불편함을 감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달라이라마 스님은 내적 갈등이 있어도 행을 함에 있어서는 나를 우선에 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기심과 이타심 사이에서 이 말이 무슨 뜻인지 헷갈립니다. 나를 존중하는 것과 이기적인 마음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요?” 


- 법륜 스님 : “원시 시대에 내가 혼자서 사냥을 하면 토끼 한 마리를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둘이서 협력을 하면 세 마리를 잡을 수 있습니다. 각각 하는 것보다 협력하는 것이 이익이라고 다들 생각을 하죠. 협력을 했을 때 생산량이 늘어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협력하는 것이 이익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협력했을 때는 분배가 문제가 됩니다. 내가 세 마리를 다 갖고 싶어집니다. 내가 세 마리를 다 가지면 상대편은 한 마리도 못 갖게 되잖아요. 그러면 상대는 손해를 보게 됩니다. 손해를 봤기 때문에 이 사람은 다음부터는 협력을 안 하게 됩니다. 그럴 때 내가 세 마리를 갖는 것은 오늘은 이익인데 내일도 지속적으로 이익을 유지할 수가 없어요. 오늘 하루로써 끝나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분배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 최소한으로 너 한 마리 나 한 마리는 가지고 증산된 한 마리를 갖고 어떻게 나눌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내가 가질 수 있는 최소는 한 마리이고, 최대는 세 마리가 아니고 두 마리라는 것입니다. 이럴 때 ‘내가 한 마리를 갖겠다’ 하는 것은 욕심이 아닙니다. 이것은 기본 권리에 속합니다. 내가 한 마리 이상 두 마리 이하를 갖겠다고 하는 것은 욕망이라고 합니다. 내가 두 마리 이상 세 마리를 갖겠다고 하는 것은 과욕이라고 합니다. 이 과욕을 부리게 되면 상대에게도 손실이지만 나에게도 곧 손실입니다. 그래서 과욕은 버려야 합니다. 사회제도적으로는 과욕을 못 부리게 규제를 해야 합니다. 한 마리를 갖겠다고 하는 기본적인 욕구는 제도적으로 보장을 해줘야 합니다. 즉 기본 권리는 보장해주고 과욕은 제재를 가해야 합니다. 지금 한국 사회가 혼란스러운 이유는 기본 권리는 보장해 주지 않고 과욕은 규제를 안하기 때문입니다. 이 과욕을 규제 안해주면 다른 사람에게 해만 되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는 본인한테도 해가 됩니다. 즉, 이익이 지속적으로 보장이 안 됩니다. 



환경적으로도 지속가능한 성장을 말하잖아요. 오늘날 우리 문명은 지구 생태계에 비하면 과욕에 속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렇게 우리가 과욕을 부려 성장을 계속하면 우리 인류 문명은 곧 종말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래서 지속가능한 발전을 유지하려면 과욕은 규제를 해줘야 합니다. 그러니까 한 마리와 두 마리 사이에서 어떻게 나눌 것이냐를 놓고 너와 내가 경쟁을 해야 합니다. 이상적인 것은 1.5마리를 갖는 것이지만, 이것이 꼭 현실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오늘 토끼를 잡는데 너는 게을렀고, 나는 열심히 일했는데 똑같이 나눈다면 기분이 나쁘고, 좀 섭섭하고 불평이 생깁니다. 그래서 이 분배는 1.2대 1.8이 될 수도 있고, 1.7대 1.3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상적인 것은 1.5씩이지만 현실은 1.5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1.5를 향해서 분배를 해 나가야 합니다. 


여기서 세 마리를 갖겠다고 하는 것은 과욕이고 이기심입니다. 이것은 버려야 합니다. 한 마리 이상 두 마리 이하를 갖겠다고 하는 인간의 욕심은 스스로 절제를 해야지 비난할 일은 아닙니다. 서로 절제를 해야 1.3대 1.7로 나누던지 1.4대 1.6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혼자서 두 마리를 다 갖겠다고 하면 싸움만 일어납니다. 


여기서 이타심은 무엇일까요? 한 마리를 갖는 것과 두 마리를 갖는 것 사이에서 이타심이 나옵니다. 나의 기본 권리도 못 찾아 먹는 것은 바보이지 이타심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도적으로 기본 권리는 보장해줘야 하고, 또 기본 권리의 보장을 위해서 우리가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내 기본 권리마저도 스스로 포기하고 타인을 위해서 희생하면 “이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 마리 갖는 것과 두 마리 갖는 것 사이에서 자기 욕망을 절제하는 것도 “이타”에 속합니다. 이타심과 이기심은 완전히 다릅니다. 


여기 거지가 한 사람 있다고 합시다. 내가 도와주려니 돈은 없고, 안 도와주고 가려니 마음이 불편합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기 마음 다스리는 것을 우선으로 해야 합니다. 이것은 이기심이라고 하겠지만 반드시 그렇지 않습니다. 스스로가 행복하다는 것은 이기심이 아닙니다. 자기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즉 내가 행복해야 남을 실제로 도울 수 있습니다. 내가 행복하지 않는데 남을 돕는다는 것은 희생의 대가를 바라는 행동이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너부터 먼저 행복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짊어진 짐이 너무 무거우면 옆 사람의 무거운 짐을 들어줄 생각조차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무거운 짐을 탁 내려놓아버리면 옆에 사람이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또한 들어줄 여력도 있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가 먼저 행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기심이 아니라 이타심의 전제가 되는 것입니다. 



세속에서 말하는 “이타심”과 수행에서 말하는 “이타심”은 서로 다릅니다. 세속에서 말하는 이타심은 자기도 무거운 짐을 지면서도 남의 무거운 짐을 들어준다는 것인데, 이것은 남을 위해서 자기가 희생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이것을 “이타심”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반드시 나중에 원망하는 마음을 내게 됩니다. ‘내가 이 고생을 하며 너를 도와주었는데 너가 그 은혜를 모르는구나’ 하면서 서로 원수가 됩니다. 그래서 이것은 수행 차원에서는 좋은 것이 아닙니다. 수행 차원에서는 ‘내가 너를 돕는 것이 나한테도 좋다’ 이런 마음이여야 합니다. 자기 희생이라는 생각을 넘어서서 남을 도울 때 이것을 수행에서는 “자리이타”라고 부릅니다. 자기를 이롭게 하는 “자리”와 남을 이롭게 하는 “이타”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