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계 100회 강연

[법륜스님 세계100강 제26강] 포루투갈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자꾸 섭섭한 마음이 들어요"

안녕하세요. 전 세계 100여개 도시에서 만난 사람들이 묻는 인생에 관한 질문과 법륜 스님의 답변! 오늘도 시작해 봅니다.  


법륜 스님의 세계 100회 강연 중 26번째 강연이 포루투갈 리스본에서 열렸습니다. 새벽 5시30분에 공항으로 이동하여 오전 9시50분에 스페인 마드리드를 출발한 비행기는 1시간 40분이 걸려 10시30분(포르투갈은 한시간 빠름)에 포르투갈 리스본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강연 전 시간 여유가 생겨 유적지 몇 곳을 둘러 보았습니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벨렝 탑’입니다. 벨렝 탑은 대항해가 활발히 이루어지던 1515년 리스본 항구를 보호하기 위해 건설된 해양경찰대 탑입니다. 마누엘 양식으로 유명한 건축물인데, 마누엘 양식은 16세기 초 해상무역으로 부를 누렸던 포르투갈 고유의 바다와 연관된 화려한 건축 양식입니다.


▲ 벨렝 탑


특히 이곳은 우리에게 세계사 책을 통해 널리 알려진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로 출발한 장소이기도 하다고 합니다. 


벨링 탑에서 해안가를 따라 천천히 걸으니 거대한 ‘발견 기념비’가 나타났습니다. 해양 국가 포르투갈의 기초를 쌓는데 공헌한 ‘엔리크 왕자’의 서거 500주년을 기념하여 1960년에 건립된 이 기념비는 높이가 무려 52m가 된다고 합니다.


▲ 발견 기념비


기념비에는 15세기 범선의 선머리 형상에 여기에 기여한 역사적 인물을 조각해 놓았는데, 맨 선두에 있는 인물이 ‘엔리크 왕자’, 두 번째가 인도 항로를 발견한 ‘바스코 다 가마’, 세 번째가 브라질을 발견한 ‘빼드루 알바르시 까브랄’ 이라고 합니다. 


기념비 앞 광장 바닥에는 신대륙을 발견한 년도가 표기되어 있는 세계 전도와 풍랑판이 있어 언제 어느 대륙에 도착했는지 연도 비교를 할 수 있었습니다. 



▲ 광장 바닥에 그려진 신항로를 발견한 연도가 표기되어 있는 세계 전도 


강연을 마치고 해질 무렵 도착한 조르지 성은 리스본의 7개 언덕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 성입니다. 9세기에 완성된 성으로 15세기까지 포르투갈의 왕족들이 거주했던 곳이라고 합니다. 성벽 위에 오르니 리스본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며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 조르지 성의 성벽 위에서 본 리스본 전경


5세기 경 로마인들이 축성을 시작해서, 9세기경 이슬람 쪽에서 넘어온 무어인이 완성시켰다고 하는데 대지진을 겪고 110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튼튼하게 그 모양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아마도 암반 위에 성을 지었기 때문에 지진에 비교적 영향을 덜 받지 않았나 싶다” 하시면서 성벽의 이곳 저곳을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포르투갈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함께 느껴보며 1시간 정도의 산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강연장은 현지 한인회장님과 목사님의 도움으로 한국어 학교가 열리는 학교 교실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오후 3시부터 시작된 강연에는 총 14명이 참석했습니다. 아마도 세계 100회 강연이 열리는 115개 도시 중에서 가장 작은 인원이 참석한 것으로 기록될 것 같습니다. 


저 멀리 북쪽에 있는 ‘포르투’라는 도시에서 새벽에 출발해서 오신 분도 2명이나 있었고, 배낭여행을 하다가 카카오스토리에서 강연 소식을 접하고 온 학생 3명도 있었습니다. 한인회장님은 “포르투갈 전체에 한국인 교민이 100명 살고 있는데 그 중에서 10명이 넘게 온 것은 정말 많이 온 것” 이라 하시며 혹시나 스텝진들이 참석 인원이 적은 것을 염려할까 설명을 덧붙여 주었습니다. 



스님은 강연 직전까지 목이 계속 잠겨 있고 감기 기운이 심해서 강연을 과연 할 수 있을까 염려가 되었는데, 강연이 시작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교민들의 10%나 왔으니 정말 많이 왔네요” 하며 활짝 웃으면서 청중들과의 즉문즉설을 시작했습니다.  



2시간 30분 동안 총 8명이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외국에서 오래 살면서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서운함이 느껴진다는 여성 분의 질문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 


- 질문자 : “포르투갈에 온지 25년이 넘었습니다. 저희 집은 대가족이고 제가 팔남매 중에 막내인데 어렸을 때부터 명절 때 서로 연락도 하고 잘 챙기는 분위기에서 자랐어요. 어렸을 때 이모 있는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는데, 그러다보니 저는 조카들 생일도 챙기고 조카들에게 굉장히 얽매이는 이모가 되었습니다. 외국에서 오래 살다보니 마음속에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이 많아서 가족들은 더욱 챙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저 혼자 가족들을 짝사랑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명절 때마다 언니들에게 자주 연락을 했는데, 이번 추석 연휴에는 연락을 안 해봤는데 아무도 저한테 연락을 안 하는 겁니다. 카톡은 사용이 무료인데도 카톡 메시지도 안 보내는 겁니다. 자존심도 상하고 점점 옹졸해져 가는 것 같고 서러움도 생겨서 요즘 잠도 제대로 못자고 있습니다.” 


- 법륜 스님 : “말씀을 들어보니 한마디로 ‘본전 생각이 난다’ 이거네요. 그동안 투자한 본전이 아깝다 이거죠. 맞죠? 한번 자신을 돌아보세요. ‘내가 요즘 본전 생각이 간절하구나’. 그동안 투자한 것에 대해서 이익이 회수가 안 되고 있어서 투자를 계속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에 빠져 있네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계속 할거냐, 까짓것 회수도 안 되는데 투자를 끊을 거냐, 이런 고민인 것 같습니다. 투자를 했는데 이익이 회수가 안 되면 투자를 끊는 것처럼 사랑을 줬는데도 그 사랑이 안 돌아오면 미움으로 바뀌는 겁니다. 한국에서 어떤 산을 좋아하세요?” 


“설악산이요.” 


설악산에 한 번 가고 두 번 가고 세 번 가면, 가면 갈수록 설악산이 좋아집니다. 그런데 질문자가 설악산을 좋아한다고 설악산이 질문자가 올 때마다 반갑게 맞이해 준 적이 있어요? 없지요. 그렇다고 해서 ‘이 놈의 산은 내가 세 번이나 찾아와도 인사도 없네’ 이러면서 더 이상 안갑니까? 설악산이 나를 좋아하지 않아도 나는 설악산을 계속 좋아할 수 있는 겁니다. 즉, 우리가 설악산을 좋아한다는 것은 짝사랑이에요. 우리가 꽃을 좋아해서 “아이고, 장미가 참 예쁘다” 하면, 장미한테서 “아이고, 칭찬해줘서 고마워” 이런 얘기 들은 적이 있습니까? 없지요. 


‘아이고, 이 꽃 참 예쁘다’ 하면 꽃이 기분이 좋아요? 내가 기분이 좋아요? 내가 기분이 좋지요. 리스본에 와서 대서양 바다를 보고 “와, 바다다!” 하면서 좋아하면, 바다가 기분 좋을까요? 내가 기분이 좋을까요? 내가 기분이 좋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면 내가 좋지 상대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바다나 산이나 들이나 하나님이나 부처님에게는 내가 좋아한다고 상대도 응답해야 한다는 기대를 안 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랑에는 부작용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을 사랑하면 반드시 대가를 바랍니다. ‘내가 열 번 좋아하면 매번 좋다고 하지는 못하지만 한번쯤은 답을 줘야 할 것 아니냐’ 이런 요구가 지금 자기를 괴롭히는 것이지 언니가 괴롭히는 것도 아니고 엄마가 괴롭히는 것도 아닙니다. 질문자의 기대가 지금 질문자를 괴롭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너희들 이렇게 계속 원금을 안 돌려주면 이제 더 이상 투자 안 할거야” 이렇게 눈치를 줘도 가족들이 전혀 눈치를 못 채고 있으니 질문자가 지금 많이 답답한 것 같네요.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전화를 할 때 “내가 뭐 도와줄까?” 이런 전화를 하기 쉬워요? “이것 좀 도와주세요” 이렇게 내 요구가 있을 때 전화하기가 쉬워요? 내가 뭔가 필요해서 그 사람에게 부탁을 할 때 전화할 때가 많죠. 모든 전화의 90%가 내가 필요한 게 있을 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화라는 것 자체가 부탁이 있을 때 사용하라고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다 자기가 아쉬울 때 전화를 하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이 있죠. 소식이 없으면 잘 있다는 얘기입니다. 소식이 있다면 그것은 부탁 소식이다 이말입니다. 


한국사회에서 살고 있는 형제들은 그 안에서 친구도 많고 할 일도 많잖아요. 형제가 8명이면 1명 빼고 7명은 서로 소통을 많이 할 것 아닙니까? 질문자는 외국에 혼자 와 있으니까 아쉽지만 형제들끼리는 서로 아쉽지 않아요. 그러니 아쉬운 질문자가 전화하는 것이 자연스러움이라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맨날 자기가 필요할 때만 전화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것이 인간의 심리 흐름이라는 겁니다. 나는 혼자이니까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있으니 전화를 하는 것이고, 형제들은 가족들과 같이 살고 있으니까 전화할 필요성을 안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늘 동생한테 자주 전화가 오는데 무엇 때문에 전화를 따로 하겠어요? 


그러니까 내가 먼저 전화를 하는 것으로 끝내야 합니다. 언니가 전화를 받아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지요. ‘나는 전화를 하는데 너는 왜 전화를 안 하니?’ 이렇게 일대일 대응논리로 생각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질문자가 만약 한국에 전화를 안 하면 그것으로 관계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형제들은 질문자에게 별로 전화할 필요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내 필요에 의해서 전화하는 것이지 언니한테 좋으라고 전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질문자가 지금 착각하고 있습니다. 질문자가 좋아서 설악산에 가는데 마치 설악산한테 좋으라고 가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설악산에 가려다가 설악산이 나를 안 좋아한다고 ‘까짓것 안 간다’ 이렇게 미워져서 문을 닫으니, 이제 갈 데가 없어져서 지금 저한테 묻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 감옥을 만든 것입니다. 



자신은 본전만 생각하는 속물 수준인데 행동은 성인처럼 하려고 하니 힘이 들 수밖에 없지요. 성질이 나면 성질이 나는 대로 ‘언니가 전화를 안하니까 힘들다’ 이렇게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면 됩니다. 만약 길거리에 통을 놔두고 동전을 달라고 동냥하는 사람이 있다면, 주고 싶으면 주고 안주고 싶으면 안주면 되지 ‘왜 저기 앉아 있느냐?’ 이렇게 시비할 필요는 없잖아요. 주려고 하다가 안주면 내 마음이 찝찝하지 그 사람은 ‘저 인간은 왜 안주지?’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다 내가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언니에게 전화를 안 한다고 도덕적으로 아무런 나쁜 것이 아니고, 부모에게 전화를 안 한다고 아무런 나쁜 것이 아닙니다. 질문자가 하고 싶으면 하면 되고, 하기 싫으면 안하면 됩니다. 다만 거래 관계로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질문자는 지금 물질적인 거래를 안 할 뿐이지 심리적으로는 거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서 하고 싶으면 계속 해도 되지만, 그러나 대가를 바라면 상대와 원수가 됩니다. 언니가 나쁜 사람이 아니고 조카들도 나쁜 사람이 아니고 그냥 일반 사람들입니다. 산은 그냥 산일뿐인데 내가 산을 좋아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저 산도 좋아하고 저 바다도 좋아하고 저 꽃도 좋아하면 내가 좋은 겁니다. 어떻게 할래요? 질문자는 언니한테 전화를 하는 게 좋아요? 안 하는 게 좋아요?”


“전화하는 게 좋지요.” 


“그러면 내가 전화를 하면 됩니다. ‘내가 전화 세 번 하면 너도 한 번 해라’ 이렇게 계속 본전 생각하고 상거래를 할래요? 형제 간에 상거래를 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질문자는 ‘나는 너를 이렇게 사랑하는데 너는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냐?’ 이러고 있습니다. 사랑을 돈 거래 하듯이 거래하고 있습니다. 이제 상거래는 그만 하세요. 그래서 제가 늘 그러죠. ”사랑 좋아하시네” 라고요(웃음).  



그러니까 내가 좋아하면 연락하세요. 질문자가 해외에 있으니까 아마도 가족이 더 그리우니 연락을 더 많이 할 수 밖에 없지요. 형제들은 어릴 때는 언니 동생 하지만 결혼해서 자식이 있으면 자기 자식 챙기는데 급급하기 때문에 형제에게 관심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질문자는 어릴 때 이민을 와서 사고가 그 때 상황으로 굳어버린 것입니다. 질문자는 어릴 때 우애가 있었던 그것만 생각하고 있는데 한국에 사는 형제들은 이미 다 할머니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 전화 할 수 있으면 하고, 못하면 안 하면 되는 것입니다. 본전 생각 이제 그만 하시지요. 그래서 어떻게 할 거예요? 언니한테 카톡 보낼 거예요? 계속 기다릴 거예요?” 


“네, 보내겠습니다.” 


스님과의 긴 문답 끝에 굳어있던 질문자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습니다. 청중들도 질문자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내주었습니다. 


스님은 마무리 이야기를 하면서 다시 한 번 청중들을 위해 너무 작은 것에 집착해 행복을 놓치지 말라며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우리는 괴로워하고 화내고 짜증내고 살지만, 다 살고 나서 눈 감을 때 돌아보면, 괴로워했던 것이 별로 괴로워할 가치가 없고, 화내고 짜증냈던 것도 별로 그럴만한 가치가 없어요. 그 때는 난리나는 일인데 지나놓고 보면 별일 아니예요. 그것 때문에 내 인생이 달라지는 건 없어요. 그냥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는 것이지요. 


그 시점에서는 굉장히 의미 있는 것 같았는데 지나놓고 돌아보면 별 의미가 없고, 이 시점에서 하찮게 생각한 것이 지나놓고 보면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너무 현재에 집착해서 ‘카톡을 보낼까, 말까?’ 하는 것은 그거야 말로 죽을 때 돌아보면 웃기는 행동입니다. 그런 작은 것에 신경쓰지 말고,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고 그렇게 자유롭게 사세요. 너무 무거운 짐을 지고 살지 마세요. 행복하게 살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