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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퇴치

태풍이 할퀴고 간 자리, 시신 묻을 경황도 없다

지난 8일, 950만여 명의 피해자를 발생시킨 슈퍼 태풍 하이옌이 필리핀을 할퀴고 지나간 지 오늘(11월 22일)로 14일째입니다. 필리핀 피해 상황에 대한 언론 보도도 잦아지고 있는 지금, 필리핀 피해 주민들은 여전히 고통에 신음하며 도움의 손길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현재 필리핀 주민들은 지금 어떻게 고통을 극복하고 있는지, 현지 구호활동가가 전해온 소식을 전합니다. 아래 글은 국제구호단체 JTS에서 필리핀 태풍 피해 지역에 파견돼 구호활동을 하고 있는 활동가가 전해 준 소식입니다. 사진은 JTS 활동가들이 현장에서 찍은 사진들입니다.

 

 

▲ 태풍 최대 피해지역인 레이테 섬으로 들어가기 위해 부두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11월 12일 긴급구호 1일차] 태풍 피해가 극심했던 레이테 섬의 '오르목'이라는 도시로 들어가려고 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12일까지 배가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13일 처음으로 화물선이 '타클로반'이라는 도시로 들어간다고 했지만, 화물선이라 사람을 태워주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부두는 레이테 섬에 사는 가족들을 만나러 들어가려는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저마다 먹을 것들을 한 보따리씩 싸들고 부두에 모여있었지만, 정작 배에는 자리가 없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오르목은 타클로반의 서쪽에 있는데, 오르목에서 타클로반까지 가는 길이 청소가 되기는 했지만, 민간 차량으로 이동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타클로반 시는 이번 태풍으로 피해가 가장 극심했던 지역으로 언론에 많이 보도된 지역입니다. 오르목에서 타클로반으로 가는 길이 전부 막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재난 지역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해야 했습니다.

 

악취 진동하는 거리... "죽지 않은 게 다행"

 

 

▲ 물에 잠긴 잔해들. 온갖 오물이 섞여 냄새가 진동을 합니다.

 

[11월 13일 긴급구호 2일차] 오전 5시에 일어났는데, 일본 NHK 방송팀이 엄청난 크기의 위성 안테나를 설치하고 생방송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타클로반 서쪽의 오르목입니다. 시청 옥상에서 둘러 보니, 지붕이 성한 집은 거의 없었습니다. 대피소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해 주민 대부분은 무너진 잔해를 치우고 자기 집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사람들이 가게에 빵을 사기 위해 줄을 서 있습니다. 기름을 파는 가게도 장사진을 이루고 있습니다. 오르목은 다행히 해일 피해를 받지 않았지만, 태풍이 지나간 지 1주일이 지난 오늘에서야 가게들이 문을 열었답니다.

 

물가는 태풍이 오기 전보다 1.5배 올랐다고 합니다. 특히 휘발유 값은 3배 가까이 올랐다더군요. 전기가 다시 들어오려면 최소 두 달은 걸리고, 저유소(貯油所)에서 나오는 파이프가 파손돼 기름 공급도 원활하지 않은 상황이랍니다. 그나마 오르목은 해일 피해를 입지 않았고, '세부'로부터 물자를 공급 받을 수 있어서 상황이 나은 편입니다.

 

도로의 치안이 불안하다는 정보가 있어서, 가능하면 외국인 티를 내지 않으려고 에어컨도 안 나오는 가장 싼 버스를 타고 타클로반으로 이동했습니다. 버스에는 오르목에서 물건을 구입해서 타클로반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 필리핀 오르목 시에서 타클로반 시로 들어가는 길. 무너진 집들.

 

오르목에서 북쪽 카랑가로 이어지는 도로를 타고 네 시간을 이동하는 도중 둘러보니, 길가에 있는 집들 중 멀쩡한 집은 거의 없었습니다. 타클로반에 도착하기 한 시간 전부터 펼쳐지는 광경은 처참했습니다. 모든 지원이 타클로반에 집중되고 있는 상황이 이해됐습니다.

 

타클로반 길거리에는 인적이 없고 악취만 진동합니다. 군인들이 쇼핑몰을 지키고 있더군요. 부서진 다운타운을 걸어 유엔인도주의업무조정국(UN OCHA) 지휘부가 있는 시청에 들어섰습니다.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벨기에 구호팀, 터키 구호팀, CNN 방송팀, 독일 구호팀이 있었는데, NGO 구호활동가보다 언론인들이 더 많습니다. 일단 언론을 통해 상황을 알리고 그걸 통해 모금된 돈으로 지원이 들어가는 방식인 것 같습니다.

 

오늘 마을 주민에게서 "죽지 않았으니까 고마운 것 아니냐"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더 열심히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하면 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아이를 창문에 밀어 넣는 부모들

 


▲ 타클로반 시를 빠져나가기 위해 자녀를 버스 창문으로 밀어넣는 부모들.

 

[11월 14일 긴급구호 3일차] 타클로반의 거리, 냄새가 심합니다. 타클로반의 수많은 주민들이 도시를 떠나고 있습니다. 부모들이 자녀들을 버스 창문으로 먼저 밀어 넣으려는 모습을 시내 곳곳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 태풍에 휩쓸려간 학교 건물. 무너진 건물 잔해를 통해 참혹했던 순간을 상상해볼 수 있다.

 

[11월 15일 긴급구호 4일차] 많은 지원이 집중된 타클로반을 떠나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받고 있는 인근의 타나우안 시를 지원 지역으로 정했습니다. 이곳에서 파견팀이 피해 현황을 조사하는 동안, 제가 일하는 구호단체 JTS에서는 긴급구호 물자를 구입하는 등 분주하게 움직였습니다. 집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는 학교도 많이 파손됐습니다. 아이들은 공부를 이어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 도시를 빠져나가려 수송기를 기다리고 있는 이재민들.

 

 

▲ 구호활동을 펼치고자 들어간 타나우안 시의 위치. 언론의 관심이 집중된 타클로반 시의 남쪽에 위치해 있다.

 

[11월 16일 긴급구호 5일차] 이재민들은 군 수송기를 타고 마닐라로 대피하고 있었습니다. 구호단체 JTS 활동가들은 타나우안의 시장과 미팅을 했습니다. 군 병력이 추가로 파견돼 치안을 유지하는 가운데, 지역 정부 건물에 들어선 각국의 의료지원팀이 구호활동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타나우안 지역의 주유소는 대부분 완파됐습니다. 딱히 멀쩡한 숙소도 없어서 구호단체 JTS의 활동가들은 시청의 책상이나 의자에서 쪽잠을 잤습니다. 상수도나 전기가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씻지도 못하고 식사도 하루에 과자 한 봉지 먹는 정도입니다.

 

[11월 17일 긴급구호 6일차] 1차 긴급구호 물자를 마련한 후발대가 컨테이너 두 개에 물자를 챙겨서 릴루안으로 이동했습니다. 이 물자는 곧 육로를 통해 타나우안까지 옮겨져 배분될 것입니다. 배를 처음 타는 현지인 봉사자들은 배멀리로 고생하며 선실에서 일어날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 구호물자를 배분 받고 있는 어린이

 

 

▲ 줄을 서서 구호물자를 배분받으며 환하게 웃는 필리핀 주민들

 

 

▲ 구호물자를 배분받기 위해 차례 차례 길에 줄을 늘어선 주민들. 쿠폰을 나눠주는 방식으로 질서 정연하게 배분이 이뤄지고 있다.

 

[11월 18일 긴급구호 7일차] 1차 구호물자가 타나우안에 도착했습니다. 타나우안 시내 3개 마을에 총 2000가구 몫의 긴급구호 물품을 지원했습니다. 가구 당 지원 물품은 쌀 10kg, 라면 등의 식료품과 비누 등 생활용품이었습니다.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우선 주민들에게 구호물품 수령 쿠폰을 나눠주고, 줄을 선 순서대로 쿠폰을 확인한 뒤 구호물자를 배분했습니다. 식량과 생필품을 받으러 오는 주민들의 표정은 밝았습니다.

 

지역주민들은 재난을 겪고 있는 와중에도 질서정연하게 줄을 서서 구호물자를 기다렸습니다. 대부분 구호단체에서 구호물자를 나눠줄 때는 혼란스러운 상황이 발생하곤 했는데, 저희가 물자를 나눠줄 때는 돌발상황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알자지라 방송국 기자 등 외신 기자들이 연신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있었습니다.

 

굴착기로 구덩이 파 시신 묻기도

 

 

▲ 도시 전역에서 사체를 수습하기 위해 구덩이를 파고 있었다.

 

 

▲ 무너진 폐허 더미에서 놀이감을 찾고 있는 아이들. 학교에 가지 못한지 벌써 14일째가 되었다.

 

하지만, 구호물자가 들어왔다고 해서 재해 이전의 모습을 곧 되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태풍이 지나간 지 2주가 흘렀고 세계 각지에서 전해지는 구호물자로 급한 위기는 넘기는 듯했지만, 태풍 하이옌이 남긴 상처가 아물기에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무서운 재난이 지나간 자리. 하지만 사람들은 힘을 내 살아갑니다. 도와줘서 정말 고맙다고,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건넵니다. 한낮의 뜨거운 햇볕 아래 오랫동안 구호물자를 기다리면서도 현장의 활동가들과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손을 흔들며 웃습니다. 내일부터는 밥을 먹을 수 있다며 고맙답니다. 한 여성 주민은 저를 한 번 안아봐도 괜찮겠냐고 묻더군요. 서로 고맙다며 꼭 끌어안았습니다.

 

"아사 까 발라이?" (집이 어디니?)

 

긴급구호 물품 지원 현장에서 저를 졸졸 쫓아다니던 아홉살 소녀 에멜린. 어디쯤 사는지 알고 싶어 물어봤지만, 괜한 질문을 했습니다. 예쁘게 웃던 아이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습니다.

 

"왈라 나 발라이." (집이 없어요.)

 

학교도 무너져 수업도 중단된 상태입니다. 아이들은 지나가는 차량에 손을 내밀며 구걸을 하고, 폐허 더미를 뒤지며 놀잇거리를 찾습니다.

 

저희가 긴급구호 물품을 나눠주는 동안 맞은편에서는 죽은 사람들을 묻기 위해 구덩이를 파고 있었습니다. 태풍은 지나갔지만, 아직 시신 수습도 벅찬 상황입니다. 격식을 차린 장례식은 고사하고, 간신히 수습한 시신을 굴착기로 판 구덩이에 한꺼번에 묻고 있는 상황입니다.

 

언론들은 태풍 하이옌이 지나간 지 오래 됐다고들 하지만, 사람이 사는 곳을 폐허로 만든 태풍이 낳은 재난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어찌보면 이제부터 시작인 것 같습니다. 하루빨리 아이들이 학교로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이곳 주민들의 삶이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도록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보태면 좋겠습니다. 저를 비롯한 JTS 활동가들은 태풍 하이옌 피해지역의 1차 지원을 마무리하고, 이어 2차 지원 및 조기복구 사업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덧붙이는 글> 

- 필리핀 태풍 긴급구호 후원 문의 : 홈페이지 www.jts.or.kr / 전화 02-587-8995

- 긴급구호 후원금 입금 계좌 : 국민은행 075601-04-000298 (사)한국제이티에스
   (입금 후 02-587-8995로 연락 주시면 기부금 영수증 처리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