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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평화

남북정상회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지난 6월 1일, 북한 국방위원회 대변인은 느닷없이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당국 간 비밀접촉 사실과 우리 쪽 대표의 실명까지 의도적으로 공개하면서 남북관계에 큰 파장을 몰고 왔습니다. 불과 5개월 전의 일입니다. 당시 북한은 “남조선이 금년 6월 하순과 8월, 내년 3월 세 차례 정상회담을 개최하고 이를 위한 장관급회담을 5월 하순에 열자고 제안했다.”고 밝히고, 천안함 사건과 관련해 “사과를 구걸하고 돈 봉투까지 건네려 했다.”며 우리 정부를 망신 주었습니다.

‘남북 비밀접촉의 결렬과 폭로’ 이후 5개월간의 궤적

이러한 폭로에 대해 통일부 대변인은 “우리의 진의를 왜곡한 일방적 주장이며 일일이 대응하지 않겠다.”면서 “매우 유감”이라고 했고, 이에 대해 북한은 이명박 정부를 ‘역적패당’, ‘불한당’ 등으로 표현하며 “더 이상 상대 안 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 같은 남북대화 사상 최악의 사태로 당국 간 비밀접촉선(線)의 신뢰마저 붕괴되어 이명박 정부 임기 내 남북관계는 정말 물 건너 간 것이 아니냐는 걱정도 나왔습니다. 그러나 지난 5개월 동안 남북관계와 관련된 기대는 오히려 점점 높아졌습니다.

비밀접촉 공개 사건이 일어난 지 한 달이 조금 지난 7월 말, 남북한의 6자회담 수석대표가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회의장에서 별도로 만났습니다. 비록 어떠한 합의나 가시적 결과물은 없었지만 우리 정부는 이를 ‘남북비핵화회담’이라고 불렀으며, 그동안 견지해온 ‘先남북대화, 後미·북대화(내지 6자회담)’의 원칙이 충족된 것으로 보고 미국과 북한이 고위급회담을 개최하는 데 동의하였습니다. 

△ 남북한 6자회담 수석대표인 위성락 외교통상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리용호 북한 외무성 부상이 7월22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남북 6자회담 수석대표 회동을 갖기 위해 회의장으로 들어서고 있는 모습(연합뉴스).

발리회담 이후 지금까지 석 달 동안 각각 2번의 남북비핵화회담과 미·북고위급회담이 개최되고 6자회담 관련국 사이에서도 관계인사의 빈번한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6자회담 재개를 위한 명분이 조율되고 있습니다. 지난 3년간 회담개최의 조건 문제로 지루하게 ‘기 싸움’을 벌여온 것과 비교할 때 그런대로 진전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발리회담 이후 국내적으로도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습니다. 8월에 여당대표가 “경색된 남북관계가 11월에 중대한 변화를 맞을 것”이라고 언급한 후,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입소문이 시간이 갈수록 확산되었습니다. 특히 러시아 가스관 사업 논의와 함께 연결되면서 남북정상회담 추진설은 ‘단순한 가능성’을 넘어 회담개최를 예정 사안으로 보고 의제와 시기를 조율하는 문제만 남은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까지 낳았습니다.

더구나 북한은 발리회담 이후로 우리 대통령에 대한 거명 비방을 갑자기 거두어들였고, 우리 정부도 통일부 장관을 교체하여 대북정책의 변화를 시사함으로써 남북이 모두 ‘11월 중대변화’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있었습니다.

신임 통일부 장관은 전임자보다 전략적이고 유연하게 남북관계를 추진한다는 구상을 밝혔습니다. 최근에는 불교·기독교 등 종교계 지도자의 방북과 개성 만월대 유적지 남북공동 발굴 사업, 남북 겨레말큰사전 공동편찬 사업의 재개를 허용하고 개성공단 도로포장 사업에 착수하는 등 사실상 ‘5·24 조치’에 따라 스스로 묶어두었던 남북관계의 장애물을 하나씩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또한 비록 국제기구를 통해서이기는 하지만 대북 인도적 지원도 재개한다고 합니다.
 
당연한 말을 듣고도 우려가 앞서는 이유
 
그런데 막상 11월에 들어서자 우리 대통령은 유럽 순방 중 인터뷰를 통해 “임기 중에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꼭 만나야 한다는 원칙은 없으며, 정치적인 목적만으로 김 위원장을 만날 의사가 없다.”고 말해 남북관계를 지켜보는 많은 사람들을 의아하게 만들었습니다. 대통령이 한 말 자체는 당연하고 원론적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지난 몇 달간 남북관계의 큰 그림을 지켜 봐온 관찰자들은 뭔가 이상하다는 감을 떨칠 수 없습니다.

대통령의 발언은 남북정상회담 준비과정의 유무와 결부시켜 생각하면 세 가지 경우를 상정할 수 있습니다. 남북정상회담 실무 준비가 어려움에 부닥친 경우이거나,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지 않고 있는 상태에서의 원론적 발언일 수 있고, 아니면 정상회담을 둘러싸고 정부 내 이견이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세 가지 경우 모두 불안감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물밑접촉이 실제로 없는 상황에서 “정상회담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다.”는 식의 태도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차기 정부는 정상회담을 안 해도 그만일 상황이 될 수도 있지만 현 정부는 그렇지 않습니다. 천안함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남북의 근본적 입장 차이, 국제사회 특히 미국과 중국의 상반된 입장, 국내 정치권의 분열과 남남갈등에 미친 파장 등을 감안할 때 다른 사안들은 차기 정부로 미룰 수 있다 해도 이 문제만큼은 반드시 현 정부에서 매듭지어야 합니다. 그리고 현 정부만이 이를 매듭지을 수 있습니다. 더구나 문제의 성격과 비중으로 보아 이제는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는 과정을 통해서가 아니고는 해결되기 어려운 상태로 일이 복잡하게 꼬여버렸다는 점도 인정해야 합니다.

만일 현 정부가 천안함 문제의 출구를 마련하지 못한 상태에서 차기 정부가 들어설 경우, 차기 정부는 ‘천안함 사건에 대한 북한의 사과 없이는 남북관계 진전을 반대’할 것이 예상되는 국내 보수여론에 발목 잡혀 융통성을 발휘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반대로, 남북관계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 5년을 모두 부정해야만 하는 딜레마에 빠질 우려가 큽니다.

특히 최근 우리 사회에서 “천안함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이 보수와 진보를 나누는 기준이 되고,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심의 판단기준이 되는 일이 비일비재한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차기에 누가 집권하든 위에서 언급한 딜레마를 피해가기 어려울 것입니다. 천안함 문제에 대한 출구전략의 수위 조절이나 융통성 발휘는 ‘출구의 수위’를 제시한 현 정부가 결자해지(結者解之)해야 합니다. 또한 이것은 바람직한 남북관계의 정립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최근 우리 사회에 조성된 이념갈등을 봉합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이를 위한 남북정상회담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선택사항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사항이 됩니다.

북한도 남북관계와 미·북관계를 진전시킴에 있어 천안함 문제를 피해갈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문제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이명박 정부와 풀어가는 것이 훨씬 수월하며, 차기 정부에서는 남한 보수여론의 반발에 발목이 잡히거나 이념적 경직성을 수반한 극심한 남남갈등으로 오히려 북한에 정세가 불리하게 전개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남북정상회담 추진은 역사적 책무입니다
 
2012년, 내년은 한반도와 이를 둘러싼 주변국들의 정치적 리더십이 모두 교체되며 이로 인해 동북아 정세가 대단히 불안정해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남북정상회담은 이러한 정세변화를 내다보며 안정되고 예측 가능하도록 안보환경을 구축하고 남북관계를 정립하기 위해서 그 시기가 빠르면 빠를수록 좋을 것입니다. 물론 남북정상회담을 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남북관계의 특성상 근본문제를 푸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남북한 간 근본입장의 차이는 분단의 근본모순과 연결되어 있어서 이를 풀어나가는 데에는 정상들의 결단만으로는 부족하며 민족구성원 전체의 인식이 변화·성숙하는 등 현실적 조건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남북 간 신뢰구축은 상대방의 선의에 기대할 수 없습니다. 남북관계의 근본적 변화가 있어야 가능할 것입니다. 북한의 반복적인 합의 파기나 대남 도발은 우리가 그동안 북한의 행태를 변화시키는 데 실패했다기보다 한반도의 근본적 적대 구도를 평화공존 구도로 바꾸는 데 의지를 갖고 전력을 기울이지 못했던 결과로 보아야 합니다.

1976년의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과 1996년의 강릉 잠수함 침투 사건에 대해 당시 북한의 사과를 받아냈지만 북한의 도발은 계속되었습니다. 북한이 사과한다고 해서 북한의 대남 태도가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남북관계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북한의 대남 태도가 실질적으로 변화한다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북한의 버릇을 잡겠다는 허세보다는 남북관계의 근본적 적대구조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지극히 냉정한 태도가 국익 차원에서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북한을 체제경쟁의 상대로 볼 것이 아니라 민족 전체의 자유와 복리를 내다보면서 남북정상회담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천안함 문제에 대해서도 융통성을 발휘해야 할 때입니다. 조건의 사전 충족이 확보되지 않는다고, 북한의 언행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쉽게 접을 문제가 아닙니다. 체제경쟁의 우위에 있는 우리가 남북관계를 주도해나가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이를 다음 정부로 미루어 남북관계를 악화된 채로 넘길 경우 어떤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될지는 불문가지입니다. 정부가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길에 또 하나의 디딤돌을 놓을 수 있도록 사려 깊은 통찰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 글은 평화재단 제37호 현안진단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