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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평화

추석날, 어머님 영전에 드리는 새터민의 편지

오늘 제가 자원봉사하고 있는 사무실에 어느 새터민의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대한민국이 명절 연휴라고 들떠있는 추석이지만, 최근 북한의 식량난 소식을 듣고 하도 가슴이 답답하여, 돌아가신 어머님 영전에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사연이 얼마나 절절한지 편지를 읽는 내내 가슴 한 켠이 먹먹해졌습니다. 언론에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북한의 식량 상황은 매우 심각하다고 합니다. 

△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풀죽이라도 끓여 먹일려고 험한 산을 오르내리며 산나물을 뜯어오셨습니다. 최근 식량난으로 동생도 굶어죽고, 이제는 고향땅에서 어머님 산소를 돌봐드릴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다고 새터민은 절규합니다.

추석날 아침, 식량난으로 돌아가신 어머님 영전에 드리는 한 새터민의 편지입니다.
 
어머님,
추석날 아침, 제사상 위에 정중히 모신 어머님의 사진 앞에 이 아들이 술 한 잔 따라 들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어머님의 명복을 빌고 또 빌면서 그리고 쏟아지는 눈물을 머금고 마음 속으로 어머님을 부르고 또 불러봅니다. 그러면 어머님께서는 어쩐지 예전의 자애로운 모습 그대로 나의 곁으로 다가오시는 것 같고 또 자식 된 도리를 다 하지 못한 제 처사가 되살아나면서 이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것만 같습니다.

어머님, 불효를 저지른 이 아들을 부디 용서하여 주옵소서.
어머님은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인 1998년 음력 5월 12일, 세상을 떠나시기 바로 전날에도 배급 쌀도 못주는 세상을 한탄하시면서 자식들에게 풀죽이라도 끓여 먹이려고 하루 종일 그 험한 산을 오르내리며 산나물을 뜯어 오셨습니다. 그 날 아침도 멀건 풀죽 한 공기를 드시는 둥 마시는 둥 하신 채 또다시 산길에 나서시던 등 굽은 어머님의 모습이 다시금 나의 눈앞에 선하게 안겨오면서 또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어머님께서는 그 다음날에도 남보다 먼저 잠에서 깨어나셔서 산나물을 뜯으려 산으로 가긴 가야겠는데 왜 이렇게 몸이 말을 들어주지 않느냐고 하시면서 안절부절하는 모습이셨습니다. 하긴 하루 이틀도 아닌 장기로 산에 오르내리셨으니 자신의 몸인들 얼마나 고달프셨겠습니까. 여기에다 제대로 잡숫지도 못한 채 계셨으니 모든 기운이 어디에서 생겨났겠습니까. 저는 그날 어머님께서 지치다 못해 몸져누워 계시는 모습을 보고서도 어쩔 수 없이 직장 출근길에 나서야 했습니다. 무단결근이라는 오명을 받기가 죽기보다 싫어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었겠습니까? 내가 천근 무게의 다리를 끌고 집에 도착했을 때 글쎄 어머님께서 그렇게 맥없이 돌아가실 줄이야!

어머니, 어머니...
목 놓아 부르고 부르고 또 불러도 어머님은 대답이 없으셨습니다.
유언 한 마디 남기지 못하고 떠나가신 어머님,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자식으로서 어머니 한 분도 잘 모시지 못한, 어머님께서 그 고달픈 몸을 이끌고 매일같이 산에 오르실 때 왜 내가 만류하지 못했던가 하는 후회가 막심합니다.

이 아들은 그날 돌아가신 어머님 주검 앞에서 울고 또 울면서 모진 삶과 죽음, 이별의 아픔과 고통을 뼈저리도록 느끼면서 비록 어머님께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셨지만 또다시 어머님 앞에 불효를 하지 않으리라 마음 속 깊이 다지고 다졌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님, 이 아들은 어머님 영구 앞에서 다진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2년 후 여기 서울로 오게 됨으로써 어머님과 또다시 생과사의 이별을 하게 되었고, 지금은 오늘 같은 추석에도 어머님의 산소를 찾아뵙지 못하는 또 다른 불효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어머님, 만약 어머님께서 영혼이라도 살아계셔서 굳이 이 아들을 꾸짖어 주신다면 저는 지금 마음 한 구석이라도 가라앉을 성 싶습니다. 아무튼 어머님 앞에서 죄송, 죄송하다는 말밖에 더 할 말이 없는 이 아들입니다.

어머님, 제가 어머님을 고향 땅에 묻어놓고 떠나기란 사실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그러나 운명적으로 저는 그 곳에서 살 수 없었고 그래서 몇 날 며칠 밤을 꼬박 새면서 생각하고 또 고심한 끝에 큰 결심을 품고 새로운 삶을 향해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얼어 죽을 각오, 굻어죽을 각오, 맞아 죽을 각오로 혈육 하나 없는 다른 나라 만주벌판으로 발을 옮겼죠. 죽을 길이 있으면 살 길도 있다는 말과 같이 저는 어떤 은인을 만나 지금 이렇게 살아서 어머님 제사상을 마주하고 무릎을 꿇은 채 추억으로나마 어머님의 생전의 모습을 또다시 그려봅니다.

그런데 어머님, 저는 얼마 전에 또 다른 가슴 아픈 소식을 들었습니다.
얼마전 어머님의 둘째 아들 석구가 굶다가 굶다가 나중에는 영양실조까지 와서 더는 버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내가 고향을 떠나기 바로 전날 밤, 우리는 단둘이 앉아서 이별주를 나누며 살아서 꼭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었습니다. 형님 없는 동안 어머님 산소를 자기가 책임지고 돌봐드리겠다던 그 동생이 죽었다니… . 나라도 곁에 있었더라면 그렇게 외롭게 죽지 않았을 것인데 이 형마저 없었으니 다시 못 올 세상을 떠나야만 하는 동생의 그 때 그 심정이 어떠했으랴 싶어 지금 저의 가슴은 터질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고향 땅에서 어머님 산소까지 돌봐드릴 사람은 아무도 없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면서 저의 마음 한 구석에는 원한과 분노가 한꺼번에 밀려옵니다. 물론 이것이 저 혼자만이 당하는 고통, 저 혼자만의 삶은 아닙니다.

벌써 수많은 사람들이 고향에 부모형제들을 두고 이곳에 와서 새로운 삶, 인간다운 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들 모두가 만약 그곳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300만이나 굶어 죽어가던 그 시절 아마도 같은 처지를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지금도 내가 나서 자란 땅에서는 혹독한 식량난으로 또 숱한 사람이 굶어죽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눈물이 마를 새 없고 곡성이 그칠 새 없다고 합니다. 하긴 세상을 잘못 만난 탓이지요.

어머님, 오늘은 이만합니다. 지금 새날이 밝고 있습니다. 무한한 사랑으로 감싸주시고 보살펴 주시던 어머님의 명복과 이 형을 남겨두고 먼저 떠나간 사랑하는 동생의 명복을 함께 빕니다.

2011년 9월 12일
서울에서
큰 아들 올림

△ 얼마 전, 북한에서 일어나고 있는 식량난으로 동생이 굶어서 죽었다는 새터민은 하루빨리 남한 정부의 긴급식량지원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바랬습니다.

편지를 보내온 새터민은 동생이 굶고 굶다가 죽고 말았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하며 울분을 터뜨렸습니다. 편지글을 읽으며 제 마음도 먹먹해 졌습니다. 한민족의 가장 큰 명절 추석이지만, 휴전선 너머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굶주림으로 고통스럽게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습니다. 추석 명절이 되어도 이산가족 문제는 이제 더 이상 이슈가 되지도 않습니다. 남북관계가 어떻게 이 지경까지 왔는지 그냥 한 숨만 나올 뿐입니다. 같은 동포임을 떠나서 이웃 국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의 고통에 처해 있는데 아무런 관심을 안 가지는 이 국가를 우리 후손들은 어떻게 평가하게 될까요? 지금 당장의 정치 쟁점에 휘둘려서 바로 옆 이웃들의 고통을 보지 못합니다. 상대에게 끌려다니면 안 된다는 정치 게임에 애꿎은 주민들만 배고픔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그들을 대신해서 몸부림도 쳐주고, 아우성도 쳐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즐거운 추석 명절이지만, 이 명절조차도 전혀 즐길 수 없고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함께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어떻게든 경색된 남북관계가 풀리고, 인도적인 식량지원이 재개되어서, 주민들의 아사를 막을 수 있는 길이 열리길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지금 MB 정부에서는 아예 기대도 안 합니다. 다음 정권에서만큼은 제발 그런 날이 왔으면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