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반도평화

새터민, 북에 계신 어머니 꼭 살아계셨으면...

오늘은 추석입니다. 온 나라가 명절 분위기로 들뜰 때 쓸쓸한 추석을 보내는 분들이 있습니다. 바로 북한에서 오신 새터민 분들입니다. 평소에 알고 지내는 새터민에게 추석을 맞이하여 전화를 드렸습니다. 오늘이 추석인데 북에 두고 온 가족 생각에 마음이 적적하실 것 같아 잠시나마 위안이 되어 드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가볍게 담소를 나누다가, 여러 가지 궁금한 이야기들이 오고갔습니다. 새터민 김00씨(여, 48세)는 식량난으로 북한에서 남편을 잃고 딸과 함께 국경을 넘어왔습니다. 중국에서 조선족 남편과 결혼하게 되었고, 2년전 한국에 정착하였습니다.

- 잘 지내셨어요? 오늘이 추석인데 어떻게 보내시고 계세요?

“저는 올해 3번째로 추석을 맞았습니다. 남한사람들처럼 놀러도 가고 싶지 않고, 즐거운 마음이 별로 안드네요;; 작년에도 우울한 마음으로 쓸쓸하게 보냈습니다. 올해도 비슷할 것 같아요. 전화라도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 북한에서는 추석을 어떻게 보내셨어요?

“북한에서 추석은 조상님들을 찾아 산소에 간다는 의미가 더 큽니다. 조상님들 만난다는 기분 때문에 다들 신나게 갔었죠. 갈 때 술도 좀 가져가고, 기본음식은 떡을 가져갑니다. 밥은 한그릇만 가져가요. 산소 앞에서 술을 붓고, 잔을 올리고면, 자식들이 한줄로 서서 절을 세 번씩 합니다. 묘 앞에서 자리를 깔고 가져온 음식을 산에서 다 먹고 내려옵니다. 같이 이야기도 나누다가 집으로 돌아옵니다. 단 하루만 묘소 찾아갔다 오는 것이 전부입니다. 남한에서는 3일 이상 연휴를 가지고 길게 쉬지만, 당일 하루만 다녀오는 게 끝입니다. 그게 가장 큰 차이죠.“

- 추석 명절을 즐길 마음이 많이 안 나시겠어요? 마음도 무거우실 것 같고요.

“새터민들은 부모를 북에 두고 온 분들이 많아요. 한국에 오면 이게 큰 상처가 됩니다. 마음 한 구석에 커다란 구멍이 있습니다. 부모님 묘소에 찾아뵙지 못한다는 게 큰 상처거든요. 한국와서 가장 쓸쓸할 때가 바로 추석입니다. 다른 날은 괜찮아요. 고향에 두고 온 부모님 생각, 두고온 형제들, 중국에서 힘도 없이 죽어간 형제들... 이들은 묘소도 없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들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아픈 마음들을 정말 많이 가지고 살지요.“

- 북에 두고온 가족들이 있지요?

“저는 북한에 있을 때 아버지가 식량난으로 굶어서 돌아가셨어요. 추석 때 마다 산소에 가서 인사하고 그랬어요. 아버지 산소도 직접 옮긴 적 있고요. 북한에서는 '멸래'(?)라고 해요. 이번 추석에 아버지 산소에 못가는 게 가장 마음이 아픕니다.“

- 한국에 와서 돌아가신 아버님을 위해 작게 차례를 지냅니까?

“못했어요. 마음 속으로만 합니다... 중국에서 만나 결혼한 남편 집안이 기독교거든요.”

- 어머님은 지금 북한에 살아계신가요?

“아직 생사 확인을 못했습니다. 살아 있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오늘 같은 날 아침, 북에 계신 어머님은 아버님 산소에 찾아가서 차례를 지낼 겁니다. 저랑 동생만 한국에 왔으니, 나머지 형제들은 어머님이랑 같이 산소에 갈 겁니다.“

- 마음이 많이 아프시겠어요.

“괜찮습니다.”

- 딸과 같이 넘어왔다고 이야기 들었어요. 따님은 추석을 어떻게 보내나요?

“16살입니다. 학교 다니고 있습니다. 친구들과 같이 놀러 가더라구요. 영화보러 가기도 하고요. 어린 아이들은 추석의 의미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굳이 설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생전에 살아 계실 때 잘 해드리는 것이 우리 집안의 원칙이거든요.”

- 북한의 추석음식은 뭐예요?

“떡이 기본인데, 한국과 다릅니다. 송편 떡인데 북한식과 남한식이 다릅니다. 손으로 다 빚어서 하고요, 하얀 쌀가루로 반죽을 해서 콩을 삶아서 절구에 찧어서 반죽 안에 설탕가루 같은 것을 만두속 만드는 것처럼 손으로 다져놓고 반달 모양식으로 찝니다. 걸미떡도 먹습니다. 네모나고 넓적한 떡인데, 남한에도 있던데 아시죠? 한국보다 속을 넣는 방식이 다릅니다. 한국은 너무 달게 하지만 북한은 달게 하지 않습니다. 아무튼 떡이 기본입니다.”

(사실 떡 부분은 제가 잘 못 알아들었습니다. 음식 요리에 많이 약하거든요;;)

- 한국은 민족의 대이동이라고 해서 교통체증이 심하잖아요. 북한에도 이런 이동 풍경이 있나요?

“개인적인 이동은 못합니다. 통행증을 발급 받아야 하는 통제된 사회니까요. 개인승용차도 없고, 버스도 없죠. 멀리 있는 사람들은 기차를 타고 가기도 하지만, 북한주민들은 친척들끼리 가까운 곳에 살기 때문에 걸어서 갑니다. 큰 바구니에 음식을 담아서 보자기로 묶어서 머리에 이고, 묘소를 찾아 모두 산으로 갑니다. 아침 8시가 산으로 올라가는 시간입니다. 걸어서 올라가려면 시간이 좀 걸립니다. 성묘하고 술도 먹고, 속이 타면 우는 사람도 있고 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 최근 북한에서는 97년 고난의 강행군 때처럼 식량 상황이 많이 어려워졌다고 들었어요. 어려워졌음에도 불구하고 묘소를 찾아가는 가정들이 있을까요?

“어떻게 해서든 다 갑니다. 아무리 먹고 살기 어려워도 묘소는 다 갑니다. 97년 사람들이 무수히 굶어죽을 때도 다 갔습니다...”

- 북에 계신 어머님 생각이 많이 나시겠어요?

(물어보기가 많이 망설여졌지만, 한번 여쭈어 봤습니다;;  울먹이시며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저는 어머님에게 간곡히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통일되는 날까지 어머님이 꼭 살아계셨으면 하는게 간절한 바램입니다. 그 때까지만 제발 생존해 계셨으면 해요. 다른 건 바라는 게 없어요. 어머님에게 가장 미안한 것은, 제가 남한에 와서 아버님 산소에 같이 인사 드리러 가지 못하는 것이 가장 죄스럽습니다. 그동안 십여년 아버지 산소에 못갔으니까, 꼭 찾아가서 인사드리고 싶습니다. 통일이 되는 그 날에는 고향으로 제일 먼저 달려가서 어머님을 찾아뵙고 싶어요. 그 때까지 어머님이 살아계셔 주세요.“

새터민 oo씨는 끝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저도 그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서 함께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민족의 대명절 추석입니다. 모두들 선물 한꾸러미 가득 싣고서 보고싶은 가족들 찾아 고향에 내려와 계실 겁니다. 하지만, 고향이 있어도 가지 못하고 가슴앓이 하는 새터민 분들이 우리 사회에는 2만명이나 있습니다.

또한
같은 민족임에도 명절을 즐기지 못하는 반쪽이 있지요. 바로 2000만 북한동포들입니다. 남한에서는 제사상 차리느라 ‘명절 증후군’이란 것도 겪지만, 북한 주민들은 제사상 차릴 음식 조차 없어서 생사의 길을 헤메이고 있습니다. 상에 올릴 음식, 아이들 입에 넣어줄 음식 한주먹이라도 구할 수 있으면 너무나 행복하겠다고 합니다. 2011년 한가위 추석이 남북한으로 갈라져서 같은 하늘아래 이렇게 다릅니다.

북에 두고온 어머님이 살아있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새터민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하루빨리 국제사회와 한국정부의 도움으로 15년 전의 수백만 동포의 죽음이 다시 발생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래봅니다.

공감하신다면, 아래의 추천 단추를 꼭 눌러주세요^^